지지한다더니... 총리 되더니 싹 변했다

[유러피언드림- 무상의료의 꿈 영국⑧] NHS 개혁을 둘러싼 논란

등록 2011.09.19 11:54수정 2011.09.1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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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2011년 3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잉글랜드 프림리의 한 병원에서 NHS 종사자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있다.
2011년 3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잉글랜드 프림리의 한 병원에서 NHS 종사자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있다.AP-연합뉴스
2011년 3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잉글랜드 프림리의 한 병원에서 NHS 종사자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있다. ⓒ AP-연합뉴스

"의회의 모든 사람들은 오늘 아침 6살 어린 나이에 운명을 달리한 아이반 캐머런의 죽음에 슬픔을 표하며 데이비드 캐머런·사만타 부부와 그 가족에게 애도를 보냅니다. 아이반 캐머런은 짧은 6년이라는 생애 동안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소중하며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에 어느 부모에게든지 자녀의 죽음은 참으로 인내하기 힘든 슬픔입니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나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슬픔의 순간에 서로를 위로하고 시련에는 동감과 연민으로 하나 되게 하는 보편적인 인간 유대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 2009년 2월 당시 고든 브라운 총리가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에게 보낸 애도문(브라운 총리 역시 2002년 딸을 잃었다).

 

현재 영국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합정부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 2009년 첫째 아들 아이반 캐머런을 잃었다. 뇌성마비와 중증 간질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반은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런던 패딩턴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사망했다.

 

NHS 지지한다더니... 총리 되더니 싹 변했다

 

이같은 가슴 아픈 가족사 때문인지 캐머런 총리는 노동당 정부 시절인 1948년 만들어진 영국의 공공의료제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 대한 고마움을 자주 표현했다. NHS에 비판적인 보수당 안에서도 예산 확대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당신이 부상을 당하거나 어떤 질환에 걸렸을 때, 당신이 누구이든지, 어디서 왔든지, 뭐가 잘못이든지, 은행에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든지 간에, 당신은 사람들이 돌봐 주고 잘못된 것을 다시 바르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곳에 갈 수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하지만 캐머런 총리의 NHS에 대한 지지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인 발언이었음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0년 탄생한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합정부가 NHS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NHS는 1차 의료를 담당하는 '개인별 주치의(GP)'와 '병원(Hospital)'의 2차 전달 체계로 운영된다. 연합정부는 그동안 의료 전달의 중심이었던 병원보다는 일상적으로 환자를 만나는 주치의인 GP와 다른 임상의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과 권한, 국가 예산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민간병원과의 경쟁도 천명했다. 현재 NHS에서는 엉덩이와 무릎 수술 등 몇 개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민간병원과 자선기관들이 개입할 수 있다. 비용면에서는 NHS 예산 중에서 1/20 정도만 투입되고 있다. 하지만 연합정부는 이를 더욱 확대해 NHS 병원을 민간병원과 경쟁 시키겠다는 것이다. 캐머런 총리 역시 NHS 병원들이 더 관리되고 균형 잡힌 방법으로 경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NHS를 민영화하려는 것이냐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또 연합 정부는 영국에는 병원이 너무 많다며 지역 병원 서비스를 줄이거나 잠정적으로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암과 심장수술처럼 복잡하고 세밀한 치료가 늘면서 지역 병원보다는 전문가 중심의 좀 더 큰 전문병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수당은 이미 지역 병원 폐쇄를 위해 싸우겠다고 천명했으며 캐머런 총리 역시 기꺼이 전투를 벌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현재 영국의 NHS의 가장 큰 문제는 갈수록 늘어나는 지출 예산이다. 인구 고령화와 신약과 치료비 증가, 기대수명 증가, 삶의 방식 변화 등으로 인플레이션 증가율보다 NHS 예산은 훨씬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기대수명이 증가하면서 당뇨와 심장질환 같이 오랜 기간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 또한 늘어났다. 이는 이전보다 더 많은 NHS 예산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예산 증가와 직결된다.

 

하지만 영국도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때문에 연합정부는 재정 절감이 NHS에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NHS는 2015년까지 200억 파운드, 즉, 매년 예산에서 4% 재정 절감을 요구받고 있다. 이는 의료 서비스의 감소 혹은 축소와 직결되며 오랜 문제점인 대기시간 또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에드 밀리바드 노동당 당수는 "NHS 200억 파운드 재정 절감은 NHS의 상당한 서비스를 환자에게 뺏어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같은 NHS 개혁은 노조뿐만 아니라 의료 인력, 보건서비스 전문가들, 그리고 영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에 부딪혔다. 지난 7월 런던 중심가를 비롯, 영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Save Our NHS(NHS를 지키자)'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담당 부처인 보건부는 NHS의 미래를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NHS에 대한 영국민들의 만족도가 높은데 왜 굳이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시장주의자들조차 연합정부의 NHS 개혁은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NHS는 보편적 서비스로 남을 것"... 한발 물러난 총리

 

 데이빗 캐머런 영국 총리의 가면을 쓴 NHS 지지자가 웨스트민스터궁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데이빗 캐머런 영국 총리의 가면을 쓴 NHS 지지자가 웨스트민스터궁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데이빗 캐머런 영국 총리의 가면을 쓴 NHS 지지자가 웨스트민스터궁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EPA-연합뉴스

이 같은 반발에 직면한 연합정부는 현재 NHS 개혁에서 한발짝 물러나 수정된 개혁안을 마련하고 있다. 수정안은 지방병원 폐쇄 등을 담당할 NHS의 새로운 조직 케어 커미션 그룹에 GP뿐만 아니라 병원 의사와 간호사 역시 참여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유민주당의 앤드류 조지 의원은 "NHS 원래 개혁안보다 총체적인 유턴"이라고 평했다. 그는 "좀 더 면밀한 검토를 위해 NHS 개혁안이 의회로 돌아가야 한다"며 "향후 2개월여의 논의 기간 동안 더 나은 계획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역시 "NHS는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국민들에게 차별 없이 제공하는 보편적 서비스로 남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부의 개혁으로 NHS가 더 효과적이고 통합적인 의료 서비스로 개선될 것"이며 "문제점인 대기 시간은 감소되고 예산 역시 매년 상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영화 우려에 대해서는 "NHS가 민영화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고 "민간의료기관이 NHS에서 이익이 되는 부분만 골라 뺏어가는 체리피킹(Cherry-picking) 역시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영국 의학 저널(BMJ)>에 발표된 영국민들의 NHS 신뢰도 조사(2011년 3월)에 따르면 국민 64%가 아주 만족하거나 만족하고 있다. 더욱이 1차 의료를 담당하는 GP에 대해서는 2001년 39%보다 훨씬 높은 80%의 만족도를 보였다.

 

함마쉬 멜드럼 영국의협회 회장은 "NHS가 완벽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미국처럼 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의료제도에서 배울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여전히 훨씬 더 훌륭하다는 교훈을 주는 의료제도"이며 "보편적 원칙을 기반으로 제도적 장애 없이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모든 국민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왕립의학학회 저널(Journal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NHS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 17개국 비교에서 아일랜드에 이어 두 번째로 비용 효과적인 의료제도로 평가 받았다. 반면 미국은 가장 비효율적인 의료제도로 꼽혔다.

 

캐머런 영국 총리, '철의 여인' 대처처럼 될까

 

아무리 발전된 사회라도, 더욱이 제도적으로 발전한 복지국가라도 완벽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NHS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제도라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NHS가 경제적 이익과 영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료제도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영국인들에게 NHS는 제도적인 제한 없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필요할 때 언제든지 쉽게 만나고 도움을 받는 궁극적인 의료제도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의 무한한 신뢰로 63년 역사를 이어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느리고 기다려야 하는 문제점도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NHS 하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의료 서비스를 제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 중증 질환에 걸리면 가족 전체의 생계가 위협받는 일도 없다.

 

마가렛 대처 시절 영국 정부는 NHS의 재원을 조세로 충당하는 구조를 바꾸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대처 총리는 "NHS는 안전하게 우리 손 안에 있다"고 선언해야 했다.

 

내년 봄 연합정부는 자신들의 NHS 개혁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전례 없는 행보를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장애를 지닌 아들 때문에 NHS에 대한 지지를 표했던 캐머런 총리.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NHS 때문에 전국민적인 반발에 처해야만 했다. 앞으로 영국 국민들과 정부 사이의 NHS를 둘러싼 싸움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볼 일이다.

#유러피언드림 #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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