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첩에 담긴 당찬 할머니와 잘생긴 할아버지의 젊었을 시절. 사진 한켠에 나이를 적어두신 할아버지의 글씨체가 낯익다.
김현정
- 엄마, 외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써보려 해요. 외할머니 어릴 때 이야기를 들은 게 있나요?"니네 외할머니 김정화 여사는 1920년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구엄리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어. 어린 시절 말괄량이에 천방지축으로 동네에서 유명했대. 꾀가 좋아서 장난은 당신이 치고 혼은 언니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더라. 아버지 몰래 동네 야학에 다니다가 다리가 부러질 만큼 맞았다고도 하고. 큰언니 아이를 보라고 하면 놀고 싶어서 아이를 업고 뛰어 놀다가 아이를 떨어뜨려 이마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지. 계집애가 조신치 못하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고 해."
혼기가 차 옆 마을의 상처한 젊은 홀아비와 혼담이 오가게 되자, 외할머니는 마을 친구와 혼담이 오가는 청년의 얼굴을 보러 몰래 옆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단다. 자신과 혼인할 상대의 얼굴을 돌담 너머로 보고, 꽤 잘생겼다는 것을 확인 한 뒤에야 순순히 결혼에 응했다는 후일담이다. 수줍음 많고 자상하고 차분한 외할아버지와, 결단력과 추진력·욕심이 남달라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었을 외할머니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너희 외할머니는 그 시절이 참 좋았던가봐.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더라고. 잘생긴 외할아버지 뒤에 앉아서 바람을 맞으며 가는 기분… 좋았겠지?"
남편 폐결핵에 고향 등지고 부산으로 향하다결혼 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둘 사이에 아이도 없었을 시절, 그리고 한반도에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던 그 시기에 외할아버지는 폐결핵이라는 병을 앓게 되셨다. 외할머니 인생의 위기이자 시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 폐결핵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병이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제주도 곳곳을 누비셨지만,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다는 이야기만 듣고 뒤돌아서야 했다. 그러다 어디에선가 부산에 있는 독일 양방 병원에서 외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셨다. '부산에 간다고 죽을 병이 낫겠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외할머니는 땅과 집을 팔아 뱃삯과 약간의 돈을 들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부산행을 감행하셨다.
- 진짜 대단하다, 외할머니…. 확신도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신 거네요."그게 끝이 아니야.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병원에 사람은 얼마나 많았겠어. 어찌어찌 병원 앞까지 찾아갔지만 병원 문 앞에 환자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더라고."
부산에 도착해 물어물어 병원에 도착하니, 병원은 진료를 원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길고 긴 줄을 기다리자니 거의 한 달이 흐를 테고, 외할아버지의 상태는 그 기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심각했다. 줄을 기다릴 수 없었던 외할머니는 초량성당 신부님의 추천서가 있으면 빨리 입원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부산 초량성당으로 무작정 찾아가 성당의 외국인 신부에게 애원했다.
추천서를 써주면 성당의 신자가 되겠다고 일종의 거래를 함과 동시에 외할머니는 안타까운 사정을 신부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고 한다. 제주도 사투리를 쓰는 외할머니와 외국인 신부님이 대체 어떻게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당에서 울며불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 외할머니는 결국 그 신부님의 추천서를 받아 병원에 가 외할아버지를 입원시킬 수 있었단다. 이후 외할아버지는 치료 덕인지 외할머니의 지극한 노력 덕인지 구사일생으로 회복하셨다. 그 동안 외할머니는 부산 영도에 있는 피란민 판자촌에 터를 잡고 해녀 생활을 하며 외할아버지를 간호하셨다.
"너희 외할머니는 의지의 한국인이야. 대단한 분이지. 남들 다 말리는데 여자 혼자의 힘으로 아버지를 부산까지 모시고 와서 살려내신 것을 보면….""외할머니께서는 배포가 크고 입담이 좋으셨어"외할아버지가 회복한 뒤에는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땅도 집도 없는 제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부산서 살림을 일으키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외할머니는 당신의 타고난 언변과 사회성으로 장사를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다. 처음에는 양복 겨드랑에 들어가는 반달 모양의 가죽 덧댐을 만드셨다. 외할아버지가 만들면 외할머니가 필요한 곳에 납품을 했다. 외할아버지의 미적 감각과 재봉 실력에 외할머니의 입담과 사교성이 어우러져 기울었던 살림이 점차 나아졌다. 나중에는 가죽으로 된 책가방을 만드셨다. 외할아버지가 수작업으로 열심히 가방을 만들면, 외할머니는 그것들을 부산의 가방 도매상에 가서 파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수공업을 거쳐 외할머니의 딸인 엄마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에는 시장 안에 쌀집을 마련하고는 살림이 안정됐다. 이때도 외할머니는 좋은 쌀을 구하기 위해 경상도·전라도 곳곳으로 다니셨다. 그렇게 점차 돈을 불려 결국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조그마한 공장을 마련했다. 책가방 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 시기가 외할머니의 사업 수완이 진가를 발휘하는 시기였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혈혈단신 책가방 끈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셨다. 결국 외할머니는 거래처를 부산뿐 아니라 대전·서울로까지 넓혀 전국으로 다니며 납품을 하고 돈을 벌으셨단다.
"말이야 쉽지만, 서울까지 진출해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거래를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게다가 여자 몸으로. 그만큼 외할머니 사업 수완이 좋으셨던 거지. 외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하고 수줍음이 많으셨는데, 외할머니는 정 반대로 배포가 크고 입담이 좋으셨어."그 시절 외할머니의 별명은 '변호사'였다. 동네의 누군가가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 대신 나서서 생긴 별명이었다. 또한 필요하다면 높으신 분에게도 찾아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기도 하셨단다. 외할머니께서는 당신이 어려워도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호인이셨다. 그녀의 딸(엄마)도 외할머니를 닮았는지 영특해 걱정 없이 부산의 명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서울 소재 명문 대학교에 합격하는 기쁨까지 맛봤다.
- 엄마 합격하고 외할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말도 마. 세상에 음식을 한가득 해서는 동네 사람들을 다 불렀어…. 그런 잔치가 없었지. 당시엔 여자는 공부시킬 필요 없다고 해서 엄마 또래 친구들 중에 대학 진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다행히 너희 외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어. 공부하고 싶다는 엄마를 오히려 북돋아주셨지."
중풍에도 의지 하나로 일어난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