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정당 해산청구 중단하라"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총체적 대선개입 민주주의 파괴 박근혜 정부 규탄 19차 범국민 촛불집회'에 참석한 통합진보당 당원과 정부의 정당 해산청구를 규탄하고 있다.
유성호
"이것으로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을 위한 9차 국민결의대회를 마치겠습니다. 이후 촛불집회가 이어질 예정이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늦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9일 저녁 서울 시청광장. 오후 7시를 조금 넘겨 민주당 주최 집회가 끝났다. 사회자가 이후 촛불집회를 안내했지만 광장에 모였던 민주당 각지구당 깃발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곧이어 시국회의에서 촛불집회를 알리는 방송을 내보냈다. 뒤이어 민주당 깃발이 빠져 나간 자리에 통합진보당 깃발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불과 20여 분 사이에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섞이지 않는 기름과 물처럼 갈라섰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바꿨다.
'아니, 왜 함께 하지 못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촛불시민인 아내와 나는 3시간 내내 비를 맞으면서도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운 건 젖은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왜 함께 하지 못하는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박근혜 정부 출범 9개월이 다 돼 가지만 의혹이 더 확산되는 양상이다.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마저 대선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지만 대통령은 "국정원 사건과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으며, 새누리당은 "수사중인 사건이니 만큼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검찰총장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났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팀장인 윤석열 검사는 수사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 중징계까지 당했다. (물론 이 징계 과정도 검찰 지휘부가 짜놓은 각본대로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윤석열 검사의 징계가 당연한 조치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에 호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에서 저질러진 대선개입보다 박근혜 정부에서 자행되고 있는 사건 은폐가 더 큰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대선 부정을 덮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광폭 행보 속에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합법적인 정부라는 오만만이 가득 묻어날 뿐이다. 민주주의 운영원리는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으며, "이게 나라냐"라는 비아냥거림이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민주당 김태년 의원은 이러한 상황을 "파시즘 체제의 전조"라고 진단했다. 지난 10일 개인 성명을 통해 "사적 이익과 욕망을 채우려고 한 이명박 정부보다 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위임된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며 반대세력을 고사시키고 역사를 퇴행시키고 있다"고 성토하면서 "역사 퇴행과 민주 말살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입장에서야 '박근혜씨'라고 불리는 것만큼 펄쩍 뛸 용어지만 작금의 정치 현실과 비추어 보면 이만큼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표현도 없을 듯하다.
파시즘은 반합리성에 기초한다. 이성을 앞세우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고 광신적이며 독단적이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청구, 2007년 남북정상회담대화록 유출 사건 등은 이성적 판단에 의한 행위라기보다는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보수 세력을 규합하고 반대세력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반합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이성보다는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광신적 집단이 활개치고, 왜곡된 이념이 사회를 유린하는 현상은 파시즘 체제의 전조를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파시즘의 또 다른 양태는 엘리트에 의한 정치, 국민의 정치 참여 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평등보다는 불평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은 국민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고, 국민의 목소리보다 정치권력과 엘리트계급의 목소리가 커질 때 그 사회는 위험하다. 대통령을 '박근혜씨'라고 불렀다고 해서 석고대죄를 요구하는 여당와 대통령 순방 중에 촛불시위를 했다고 교포를 상대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협박을 일삼는 국회의원, 날치기와 폭력 국회를 막겠다고 발의한 국회선진화법을 스스로 위헌 소지가 있다며 폐지나 헌법 소원을 계획하고 있는 여당. 이런 행태는 정치권력의 횡포이고 민주주의 주인인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국민들이 정치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정치는 권력의 전유물이 되는 사회. 파쇼 타도를 외치던 70-8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파시즘은 전체주의를 강조한다. 정권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세력에게는 철저한 응징이 가해진다. 굳이 통보진보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해고자 조합원 가입 문제를 빌미로 전교조에 법외노조를 통보한 것 또한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선개입을 했다며 진행한 공무원노조 서버 압수수색, 시민단체 강제해산 추진 등 국민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끝도 없이 게속되고 있다. 국가의 공인된 폭력이 대화와 타협보다 앞서는 사회. 파시즘 체제의 무서운 얼굴이다.
연석회의 출범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