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사퇴" 거리로 나선 사제단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은 22일 밤 7시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열었다. 사진은 미사를 마친 후 사제들과 신도들이 거리행진을 벌이는 장면.
오마이뉴스 장재완
시대가 다르고 정치체제가 다르더라도 국가의 최고 권력이 승계되는 과정이 당대의 이치에서 어긋나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민심은 권력을 떠났고 국가는 위기를 맞았다. 조선시대 계유정난이 그러했고,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그러했고 5·16과 12·12 군사쿠데타가 그러했다. 2012년 12월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도 이제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이번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첫째, 국가권력에 의한 부정선거는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안이다. 선거 이해당사자(특정 정당이나 후보 캠프 등)가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경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엄정중립을 지키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국가기관이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은 총성 없는 쿠데타이다. 박정희의 '오프라인 총칼'이 댓글부대의 '온라인 키보드'로 바뀌었을 뿐 헌정질서를 유린한 변란이라는 사실은 똑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때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선거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탄핵까지 당했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이 조직적으로 가담한 이번 선거개입 사건은 국가변란의 죄로 다스릴 사안이다.
둘째, 이번 부정선거는 단순히 선거기간 동안에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난 댓글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여당이 국정원 댓글사건을 덮기 위해 이슈화를 부추긴 측면이 있는 NLL 논란 덕분에 사건의 본질을 좀 더 또렷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국정원은 이번 선거에서 특정후보(국정원 표현에 따르면 '종북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록을 조작해 허위사실을 일부러 만들어 유포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이 특정한 후보를 단순히 지지하거나 비방하는 의견을 올린 정도가 아니라 그 비방의 논리를 허위로 만들어 내기 위해 '사초조작'까지 감행했다는 사실은 왕조시대에서도 전례를 찾기가 어려운 패륜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검찰의 수사결과를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 포기발언을 한 적이 없고 후대 정권을 위해 정상회담 대화 내용을 다시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 기간 김무성 박근혜 후보 선대본부장 등은 찌라시에서 봤다(?)는 대화록을 인용해서 노무현이 NLL을 팔아먹은 대역죄인이라고 몰아붙였다. 노무현과 각별한 사이였던 문재인 후보에게 이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50-60대 표심이 '종북좌파'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유래 없이 박근혜 후보로 결집했던 정황을 돌아보면 이들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던 것 같다.
셋째, 부정선거의 정황이 드러나고 수사가 진행되자 권력차원의 사건은폐와 수사방해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경찰 수뇌부에서 해당 수사팀에 압력을 행사하더니 급기야는 검찰총장과 수사팀장을 몰아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성접대 혐의가 있는 김학의 전 차관은 여러 물증에도 불구하고 무혐의 처리되는 시대인데, 증거도 없는 숨겨둔 아들 논란 때문에 검찰총수가 옷을 벗을 만큼 한국의 공직기강이 드세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12·19 부정선거의 본질은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국가기관이 1) 사초조작으로 특정후보를 대역죄를 지은 '종북후보'로 낙인찍고, 2) 댓글부대를 동원해 이를 인터넷을 통해 조직적인 방법으로 대량 유포했으며, 3) 사후에는 사건을 은폐하고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다시 국가기관이 총동원되었다.
이제는 지난 대선이 무효인가 아닌가를 논할 때는 이미 지난 것 같다. 이는 마치 군사 쿠데타가 무효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질문이 돼 버렸다. 지금 벌어진 상황보다 대체 얼마나 더 부정한 짓을 저질러야 선거가 무효가 되는 것일까? 만약 이런 부정선거가 무효가 아니라면, 후대의 선거에서는 누구라도 어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든 무조건 당선되려고 온갖 패륜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는가?
근원적인 해결과 거리가 먼 세 가지 입장 변화 이 사건에 대처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변해왔다. 처음 부정선거의 정황이 드러났던 선거 막바지, 당시 박근혜 후보는 댓글공작에 참여했던 국정원 직원을 옹호하며 부정선거 자체를 부인하였다. 당선된 뒤에는 속속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국정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최근 검찰총수와 수사팀장을 내친 뒤에는 진상을 명확하게 밝히고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세 가지 입장 모두 이번 사건의 근원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이미 12·19 부정선거와 깊숙하게 연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근혜 선거캠프와 국정원이 긴밀하고 조직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었느냐,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어떤 커넥션이 있었느냐 하는 점은 향후 수사에서 철저히 밝혀져야 할 사안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