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 있는 한 대형서점 진열되어 있다.
이희훈
헌강왕의 상황 판단은 최근 회고록을 출간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인 <대통령의 시간>을 읽다 보면, 그가 퇴임한 지 3년째인 현재 대한민국 경제가 이토록 어려운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회고록에 적힌 대로라면, 대한민국 경제가 지금 이렇지 않아야 할 게 아닌가.
이 전 대통령도 헌강왕처럼 '시중 민공'의 달콤한 말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실적을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회고록 169쪽과 170쪽에 적혀 있다. 여기에는 2012년 10월 23일 청와대를 방문한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의 언급이 소개되어 있다. 고든 브라운이 역임한 총리 직책은 신라로 치면 시중 직책이다.
"한국 경제는 매우 건실합니다. 어떻게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하는지 이 대통령께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한국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 한 가지는 한국의 국제적인 명성이 대통령님 지도력 하에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에 대해 한국 국민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내일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할 때 저는 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시중 민공은 "임금께서 즉위하신 뒤로 음양이 고르고 비바람이 순조롭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게 넉넉하여 국경은 평온하고 민간은 안락합니다"라면서 "이는 모두 거룩하신 덕의 결과입니다"라며 헌강왕을 치켜세웠다. 고든 브라운 전 '시중'도 그런 식의 말을 이 전 대통령의 귀에 넣어주었다. 물론 고든 브라운의 말은 립서비스였을 것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될 칭찬을 회고록에 자세히 소개했다는 것 자체가, 이 전 대통령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고록을 썼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국민 앞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쓴 게 아니라, 귓전을 맴도는 달콤한 말에 취해 회고록을 썼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런 점은 181쪽에 써넣은 경제 성적의 총평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5년간의 경제 실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GDP 기준으로 세계경제의 61퍼센트에 달하는 45개국과 FTA를 체결함으로써 우리의 경제 영토는 세계 3위 수준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 2010년 우리는 세계 7대 수출대국으로 발돋움했고, 2011년 12월에는 마침내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연간 무역액 1조 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 매진한 결과였다."지금 대한민국 서민들 중에 저런 총평에 공감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전 대통령이 언급한 수치를 '쾌거'라고 느끼며 가정경제에 만족할 서민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처럼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대한민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강해졌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런데 그는 막상 구체적인 경제 상황을 언급할 때는 어딘가가 좀 막혔던 모양이다. '내가 전반적으로 잘한 건 확실한데, 이 분야는 왜 이렇게 된 걸까?'라는 의문을 본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듯하다. 자신이 경제 전반을 잘 이끌었다고 자평하면서도, 실업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구체적 현안에서는 '이걸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라는 곤혹을 느낀 것 같다.
일례로, 회고록 679쪽에서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이 실업 및 비정규직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선방했다"고 자평한 뒤 "CEO 출신 대통령에게 걸었던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지만, 두 차례 세계경제위기의 파장을 상쇄하기는 힘겨웠다"고 말했다. 실업 및 비정규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 것은 재임 중의 세계경제위기 때문이었다고 얼버무린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부동산 및 주택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방면에서도 자신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게 잘했다면, 지금 상태가 이 모양이냐?"라는 비판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 670쪽에서 "그 과정에서 전세물량 부족 등 피해갈 수 없는 많은 부작용이 파생된 것도 사실"이라며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충격을 최소화하고 주택시장의 연착륙을 유도하는 것이 향후 정부의 과제라 할 것이다"라고 매듭지었다. 전세물량 부족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며 이런 문제는 차기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떠넘긴 것이다.
헌강왕처럼 되지 않도록, 절절히 기도해야이처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한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좋아졌다며 자화자찬해놓고서도, 막상 구체적인 대목에서는 '이 문제는 불가항력적인 이유 때문에 해결할 수 없었다'느니 '이 문제는 어차피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었다'느니 '이 문제는 차기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느니 하며 얼버무렸다. '전 시중' 고든 브라운의 칭찬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 그로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제3의 요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전 대통령은 19세기 중반부터 세계를 지배해온 유럽과 미국의 경제가 흔들리고 있고, 이로 인한 체제 위기가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에 동맹국인 대한민국에 끊임없이 전이되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에 슬픈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회고록이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헌강왕은 시중 민공의 칭찬에 가슴이 들떠 당나라에서 불어오는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지 3년 뒤에 신라는 국고가 텅 비는 재정위기에 봉착했다. 그러자 국가권력이 흔들리면서 민란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새 시대의 기치를 내건 인물들이 견훤·기훤·양길·궁예 등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업적을 과대 포장할 게 아니라, 자신이 헌강왕 같은 인물이 되지 않기를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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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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