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족에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경찰도 있다

길 위의 세월호 '추모' 삼보일배 동행기... 뜨거운 아스팔트, 땀은 주룩주룩

등록 2015.04.15 11:26수정 2015.04.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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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금), 연가를 내고 세월호 삼보일배 순례길에 함께했습니다. 전남 담양 한재골 넘어 장성 백양사 입구에 이르는 총 7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입니다.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와 누나, 두 부녀는 한 구간씩 교대로 삼보일배하며 진상 규명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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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땅 지나는 삼보일배 행렬 세월호 참사 발생 353일째인 지난 3일,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 누나 이아름씨와 함께 삼보일배를 이어가는 모습. ⓒ 소중한


산소통도 없이 단지 물안경에 오리발만 차고 잠수하는 꿈을 꿨다. 팽목항에서 조그만 낚싯배를 빌려 타고, 지난해 말 덴마크로 이민 간 친구와 단 둘이 세월호 실종자 9명을 찾으러 가는 꿈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바다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여전히 바닷물은 살을 엘 듯 차가웠고, 잠들어 있는 세월호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바닷속을 헤맨 탓일까. 배 위의 친구는 돌아오라 손짓했지만, 더 이상 수면 위로 올라갈 힘이 없었다. 바로 그때, 희미하게 세월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파란색 선수 부분을 살짝 드러낸 채 깊은 바닷속에 묻히고 있었다. 지난해 4월 16일,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직전의 그 모습 그대로.

바다에 파묻힌 세월호에 몸이 닿는 순간 잠이 깼다. 침대의 머리맡엔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 기록인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펼쳐 있었다. 지난밤 늦게까지 읽다가 그대로 잠든 것이다. 일어나 거울 앞에 앉으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눈물 훌쩍거리며 읽기는 이 책이 처음이었다. 이 책을 먼저 접한 아내도 하도 눈물이 나서 차마 다 읽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 밤 막 잠들기 전, 고 신승희양의 언니인 승아양의 동생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방황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읽었다. 잠수부가 되어 아이들을 찾으러 가고, 거인이 돼 배를 끌어 올리는 상상을 자주 한다는 그의 꿈이 오늘 내 꿈이 되어 나타난 것 같다. 무기력한 자신과 1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게 하나 없는 현실에서, 그나 나나 꿈에서라도 몸부림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수부가 되는 꿈... 뭐라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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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께, 삼보일배 올립니다 물과 비상약, 돗자리, 도시락 등을 실은 승합차가 맨 앞에 가고, 그 뒤를 손수레에 실은 모형 세월호가 따라갔다. 그 다음이 삼보일배 행렬이고, 맨 뒤에는 간격을 유지하며 경찰차가 따라왔다. ⓒ 소중한


아침은 환하게 밝았지만, 꿈이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졌다. 헤엄치는 것도 두려워하는 내가 잠수부가 되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다니,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인 이호진씨와 누나인 아름씨가 삼보일배하며 이곳 광주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집에서 자동차로 불과 십여 분 거리였다.


부리나케 장갑과 무릎 보호대를 주섬주섬 챙겨 그들을 뒤따랐다. 가을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이내 구불구불한 도로 한쪽에 노란 '세월호 옷'을 입은 승합차와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나란히 서 있는 걸 보았다. 앞뒤 두 대의 차가 만든 좁디좁은 그늘 사이에서 그들은 널브러져 쉬고 있었다. 주뼛거리며 대열에 합류했다.

아직 봄꽃이 만개하기도 전인데 도로 위에는 이미 여름이 와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4월의 선선한 바람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올라오는 대낮의 열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오가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은 그렇지 않아도 더운 도로를 더욱 뜨겁게 달군다. 그러나 갓길도 없는 시골의 2차선 도로 위에서 아스팔트를 벗어나 흙이나 잔디를 찾는 건 결코 녹록지 않다.


물과 비상약, 돗자리, 도시락 등을 실은 승합차가 맨 앞에 가고, 그 뒤를 손수레에 실은 모형 세월호가 따라갔다. 그 다음이 삼보일배 행렬이고, 맨 뒤에는 간격을 유지하며 경찰차가 따라왔다. 평일인 데다 시골 길이라 그런지, 뒤늦게 참여한 나를 포함해 셋뿐이었다. 승합차 운전자와 행렬의 앞뒤로 교통 수신호를 담당하는 봉사자까지 모두 포함해도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단출한 규모다.

면장갑으로 땀 훔치고...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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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일배' 함께 하는 시민들 세월호 참사 발생 353일째인 지난 3일,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 누나 이아름씨와 함께 삼보일배를 이어가는 모습. ⓒ 소중한


꿈에 이끌려 나오긴 했지만, 그들을 따르려니 살짝 겁도 났다. 세배나 성묘 때 빼고는 엎드려 절을 해본 적이 없어서다. 절에서의 108배처럼 푹신한 방석 위에서가 아니라, 딱딱한 도로 위에서 걷다가 절하기를 반복하는 일은 자칫 몸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예전에 한 스님이 삼보일배를 하다 더 이상 무릎을 못 쓰게 됐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맨 뒤에서 바로 앞 사람의 동작을 조심스럽게 따라 했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 듣자하니 진도 팽목항을 출발할 때는 하루 동안 걷는 거리가 4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쉬는 시간을 감안해 시속으로 계산하면 600미터 남짓 되는 셈이다. 그렇게 서울 광화문까지 가겠다는 계획은, 어쩌면 무모하다는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목숨을 내건 '도박' 같은 것 아니었을까.

눈은 저만치 100미터 앞으로 보고 있지만, 두 발은 고작 몇 미터를 힘겹게 전진할 뿐이다. 고작 10미터 남짓의 개울 다리를 건너는데도 두세 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을까. 손에 낀 면 장갑은 손바닥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애초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손수건의 용도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마음먹은 대로 오늘 하루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래도 팽목항에서 여기까지 온 두 부녀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동작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버텼지만, 숨이 가빠졌다. 허리를 굽힐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왔다. 진상 규명을 향한 기도의 마음은 시나브로 옅어지고, 얼마나 걸었다고 불경스럽게 쉬는 시간을 기다리며 손목 시계에 자꾸만 눈이 갔다.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손 흔들며 격려하는 사람들을 봐서라도 힘을 내야 했다. 무심히 지나가는 차가 외려 더 적게 느껴질 정도로 손 잡아주는 이웃들이 정말 많았다. 어쩌면 이는 검게 그을리고 초췌한 얼굴의 두 부녀가 여기까지 꿋꿋하게 올 수 있게 한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조차 떼기 힘든 상황에서도 생면부지 이웃들의 '힘내라'는 말 한마디는 더 없는 위로가 된다.

점심께 도로변 한 식당의 주인이 우리 일행을 막아섰다. 챙겨온 도시락을 먹겠다는 우리에게 한사코 점심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고맙다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양의 돼지 갈비와 음료수를 내놨다. 맛있게 드시니 고마울 뿐이라고 연신 말했지만, 실은 기성세대로서 미안함의 표현이자 유가족의 진실 규명 노력에 대한 공감이었으리라.

벚나무 가로수 길 위에서 오후 일정이 시작됐다. 화사한 때깔을 뽐내는 벚꽃이 바람에 비 되어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상춘객이라면 완연한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러나 우리 머리 위로 흩날리는 벚꽃 잎은 하릴없이 무심한 세월만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눈물의 시계'다. 이 땅의 벚꽃이 남김 없이 다 지면 참사 1주기다.

오후 들어 일행이 늘었다. 가까이는 광주, 멀리 전북 익산에서 부러 내려온 이들이다. 팽목항을 출발할 때부터 주말마다 참여하고 있다는 한 분은 삼보일배 예찬론자였다. 유가족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시작했지만, 절을 하며 그들과 함께 걷다 보니 정작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오후 들어 되레 속도가 빨라졌다. 새로 합류한 분들의 보폭을 따르려다 보니 뒤처지기 일쑤였다. 앞뒤 간격이 벌어지면 차량 통제가 어렵고 안전 사고의 위험이 있었다. 그렇지만 삼보일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길을 나서기 전 스스로 약속하기를, 첫 번째 세 걸음은 실종자 9명을 가족 품으로 보내달라고, 두 번째 세 걸음은 진실 규명이 이뤄지도록, 그리고 마지막 세 걸음은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멀찍이 앞서 가던 분들은 내가 올 때까지 두 손 모은 채 서서 기다려줬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더욱 힘을 내 따라 붙었다. 함께 걷지는 않아도,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마음으로 동행하는 이들도 많았다. 쉬는 시간 땀을 식히며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그들과 나는 생면부지의 '남'에서, 가족 같은 '이웃'이자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지'가 돼갔다.

내가 걸어온 길의 수십 배... 부녀는 계속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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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리는 '승현 아빠' 세월호 참사 발생 353일째인 지난 3일, 고 이승현(단원고)군의 아버지 이호진씨가 삼보일배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소중한


따갑던 해는 힘을 잃고 서산 너머에 걸렸고, 목적지는 코앞이었다. 500미터 남았다. 자동차라면 채 1분도 안 걸리는, 아니 걸어가도 10분 남짓이면 너끈할 거리다. 다 왔다고 생각하니, 어깨와 무릎이 아파 오고, 아무렇지도 않던 종아리도 욱신댔다. 과연 혼자였다면 가능했을까. 안전 사고를 막기 위해 함께했던 경찰차도 임무를 마치고 떠났다. 그들과도 서로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인사를 나눴다. 이런 경찰도 있다.

가방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비로소 꺼냈다. 오전 늦게 합류해 목적지까지 젖 먹던 힘까지 쏟아가며 걸었건만, 거리가 채 5킬로미터에도 모자랐다. 순간 두 부녀가 진도 팽목항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여정이 포개졌다. 그들이 엎드려 절하며 걸어 온 길은 얼추 180킬로미터에 달한다. 오늘 내가 낑낑대며 걸어온 거리의 무려 36배가 넘는다. 더욱 놀라운 건 앞으로도 대략 300킬로미터의 거리를 이렇게 더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한 개신교 단체가 삼보일배가 끝날 무렵 우리를 찾아와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줬다. 단지 식사 대접하며 수고한다고 위문온 게 아니라, 다음 날 모두 삼보일배에 동행하기 위해 천 리 길도 마다 않고 내려온 이들이다. 세월호는 지난해 여름 교황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와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개신교 신자들을 그렇게 연결하고 있었다.

하루를 함께한 이들 대부분은 다음 날도 여정을 함께 한다고 했다. 이제 서울 팀까지 합류했으니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모두 하룻밤 묵을 숙소로 가는 길, 그들과 헤어지며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와 인사를 나눴다. 지난해 여름, 십자가 도보 순례 때도 그랬던 것처럼, 고맙다는 말에 죄송하다고 답했다.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말이 아닌, 꼭 쥔 두 손으로 전해 드렸다.

누구는 팽목항과 경기도 안산의 분향소에서, 또 누구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1주기를 맞을 것이다. 동네마다 기관마다 크고 작은 추모행사도 열리게 될 것이다. 그날이 지나고 나면, 또 그렇게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이 식어버릴 테지만, 삼보일배의 행렬은 그날 이후 더 뜨거워질 것이다. 오는 16일, 전북 김제의 길 위에서도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다.

○ 편집|조혜지 기자
#세월호 #삼보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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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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