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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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한국 사회를 지배한 화두는 단연 '태극기'였다. 먼저 군불을 지핀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그가 지난해 12월 '2014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국제시장> 한 장면을 언급한 것이 계기였다.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 싸움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
'돌풍'을 일으킨 영화이니 만큼, 본 사람이 많았고, 이들 다수가 대통령 발언에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혹자는 대통령이 <변호인>을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는 부부 싸움 정도가 아니라, 고문경관이 주인공을 두들겨 패다가 갑자기 부동 자세를 취하며 국기 경례를 하는 명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창조적 해석'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 않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직접 영화를 본 것은 아니'라며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대통령이 어떻게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한국 공무원들이 있지 않은가. 이미 지난 2월부터 행정자치부를 선두로 교육부, 미래창조과학부, 국토교통부, 인사혁신처 등 10개 이상의 부처가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보궐선거가 끝난 후 열기가 좀 가라앉은 느낌이지만, '태극기'는 올해 내내 화두가 될 것이다. 앞으로 6월 현충일, 8월 광복절, 10월 국군의 날이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처럼 태극기와 특별히 관련 없어 보이는 기관까지 "태극기 달기에 적극 동참하며 나라 사랑에 앞장서겠다"며, '태극기 미구비 직원에 태극기 보급', '인증 사진 이벤트' 등을 벌이고 있어서도 아니다.
국민이 행복하고 나라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정부가 '나라 사랑'을 애써 강조하는 이면에는, '나라를 사랑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나라 사랑' 열기 속에서 나온 '포기 선언' 경제를 보자. 박근혜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집권 3년 차에 들어선 2015년 현재(2월 기준), 한국 청년층(15~24세) 실업률은 사상 최악인 13.5%로 곤두박질쳤으며, 청년(15~29세) 고용률은 1998년 외환 위기 당시(40.6%)와 맞먹는 평균 실적을 냈던 이명박 정부보다도 열악하다.
물론, 어느 사회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할 역량과 의지를 갖고 있느냐다. 박근혜 대통령은 '태극기 달기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3월, 뜬금없이 청년들에게 '중동 진출'을 주문했다.
"대한민국 청년이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은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꾸짖었고, 호의적 언론은 대통령이 '유머'에 회의장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사실을 집중 보도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청년들이 대통령의 '유머 감각'을 그리 높이 산 것 같지는 않다. '약 올리나', '니가 가라, 중동'같은 댓글이 줄줄이 달린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온 정말 중요한 발언은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우리가 인력 미스매치(해소)를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렇게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또 만들어질 수가 없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환경에서 국내에서 미스매치 해결하려 노력해봤자,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일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국내에서 구직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정부의 역할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사실상 정부 역할의 '포기 선언'이었다.
국민 '해코지'에 앞장선 정부박근혜 정부의 '등록 상표'나 다름 없던 '증세 없는 복지'가 집권 후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사교육비가 2년 연속 폭등했고, 기초수급자 자살률이 최고를 기록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불행히도, 박근혜 정부의 '포기 영역'이 일자리와 복지로 끝나지 않는다. '삼성의 위기'가 자주 거론되는 데서 알 수 있듯, 한국 재벌은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고 미래 사업을 개척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 제조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자, 서비스업으로 국내 공공 영역을 침식하는 해로운 '수익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예컨대 민간 보험으로 국민건강보험의 토대를 흔들고, 영리 병원으로 돈 없는 서민의 건강을 위협하며, 교육을 이윤 추구의 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보다 안전한 돈벌이에 눈이 먼 재벌 3세들은 빵, 치킨, 컵밥까지 진출해 자영업자들의 생존 터전을 잠식해가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럴 때 정부의 역할은 기업의 탐욕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낡아서 위험한 배를 운영할 수 없도록 막고, 정원을 넘겨 태울 수 없도록 규제하고, 안전 점검과 대피 훈련을 강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규제를 풀어 끔찍한 재앙을 불렀듯, 박근혜 정부는 '규제 철폐'라는 명목으로 공공 서비스를 무력화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앞장서서 추진해 온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안, 관광진흥법안, 국제의료사업지원법안, 의료법 개정안 등이 그것이다. 그는 법 통과가 늦어지자,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법인데, 누구를 위해 법을 막고 있느냐"고 불평했다. 물론 누구에게는 '좋은 법'이겠으나, 대다수 국민은 '해코지'하는 법일 수밖에 없다.
'애국' 담론으로 다시 칼자루를 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