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메시지 되살린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문재인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5년 전 메시지가 그대로 담겼다.
남소연
문재인 후보의 압승으로 끝났다. 5년 전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선거가 끝났을 때, 진보 세력은 다시는 민주정부의 시대를 맞이할 수 없을 것 같은 적막감에 휩싸였었다. 불과 5년 전의 일이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며 이 세상의 변화무쌍함을 설명하였다. 이 말을 그대로 우리 선거에 빗대자면 '같은 선거를 두 번 치를 수 없다'가 된다.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은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혁명적 변화를 거쳐 왔고, 어떨 때는 비커에 담긴 물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표면장력을 깨뜨릴 것 같으면서도 그 힘이 흐트러지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어왔다.
과거의 선거 결과에 빗대어 여러 변수를 희망적으로 조합하면 수많은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래서 더블스코어로 지는 선거 결과가 예상될 때에도 선거 캠프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의 조합들이 각 선거의 특징을 말해준다. 모든 변수의 조합이 수평적 정권교체를 예고했을 때 1997년 DJ의 당선을 가져왔고, 또 다른 조합들이 모였을 때 2002년 노무현 당선을 가져왔다. 그런 최상의 조합들이 완벽히 깨졌을 때 2007년 MB의 압승이 있었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변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였다.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야권의 대표주자로 누구를 지목하느냐가 이번 19대 대통령 선거의 승자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변수가 되어버렸다.
그럼으로써 선거는 자연스럽게 문재인이냐 아니냐로 귀결되었다. 안철수는 자신이 문재인의 유일한 대항마임을 각인시키며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꿰찼고, 한때는 여론조사로 문재인과 양강 구도를 형성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번 선거는 형식적으로 5자 구도였지만, 내용적으로는 3자 구도였음이 개표 결과 나타났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토론회에 이정희 후보가 나와 형식상으로는 3자 구도였지만 실제로는 박근혜와 문재인의 양자 구도였던 것처럼, 이번 대선은 실질적으로 문재인과 안철수, 홍준표의 싸움이었다. 오직 이 세 후보만이 두 자릿수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대선에서 낯설지 않은 3자 선거구도3자 선거 구도는 우리 대선에서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1997년 대선이 DJ와 이회창, 이인제의 3자 구도였으며, 2007년 대선도 MB와 정동영, 이회창의 3자 구도였다. 1997년에는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표를 갈라줌으로써 DJ의 당선에 기여하였고, 2007년에는 정동영이 이회창의 출마에 기대를 걸었으나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야권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는 측면을 보면 1997년을 떠올릴 수 있지만, 완벽한 압승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승패의 자리만 바뀔 뿐 형태상으로는 2007년의 선거와 더 유사하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강물이다.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국정 혼란 사태에서도 DJ는 DJP단일화와 이인제라는 제3후보 출현의 덕을 톡톡히 보고서야 청와대 입성에 성공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은 분명 커다란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한 여당의 실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보수 여당 세력이 완벽히 흔들린 최초의 선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비록 야당 시절이지만 보수 정당이 사멸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의 사례가 있긴 하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와중이던 2004년에 치러진 제17대 총선이다. 이 선거가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진보 세력이 단독 과반 정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도 여론조사 상으로 나타나던 사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한다. 천막 당사를 쳤던 박근혜 대표가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한 선거가 바로 17대 총선이었다. 대통령 선거와 비교하기 위하여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을 살펴보면 한나라당이 35.76%를 획득하였다. 당시 대승을 거둔 열린우리당의 득표율은 38.26%였다. 대한민국 의정사에 혁명과도 같은 상황을 불러온 총선치고는 정당 득표율 격차가 극히 미미하여 2.5%P에 불과하였다.
한나라당이 기사회생을 할 수 있었던 발판은 영남의 콘크리트 지지였다. 사멸해가던 한나라당 지지세는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대표의 노인 폄하 발언을 계기로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대구에서 62.07%의 정당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영남권에서 기존 지지세를 회복해내며 의석을 석권하여 전체 1/3이 넘는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비록 탄핵을 당하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역대 대통령 명단에 박근혜의 이름이 새겨질 수 있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되었던 선거였다.
이런 사례에서 공통점을 추출해내자면 보수 정치 집단이 민심의 역풍을 불러오는 실정과 정치적 패착을 하여도 만방으로 패하는 선거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IMF 외환위기에서 DJ의 신승, 탄핵 사태 속에서 한나라당이 전체 의석 1/3을 차지한 사례가 그걸 말해준다.
2007년 MB의 압승을 물구나무 선 것처럼 거꾸로 재연한 이번 선거는 이런 보수 정치 세력이 가진 정치적 저력의 역사를 완전히 과거의 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기할만한 선거로 기록될 것이다.
2위 홍준표,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