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닷새 앞둔 11일 오후 서울시 중구 중부시장에서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사고 있다
연합뉴스
엄마, 그런데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우리 세대의 아내와 남편은 평등해요. 저희 부부도 그래요. 맞벌이로 서로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안일도 함께 해요. 육아도 마찬가지예요. 육아에 열심히 참여하는 게 요즘 같은 세상에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제가 부끄러운 남편이자 사위가 되는 때가 있어요. 바로 명절이에요. 결혼하고 저희 부부는 처가보다 우리 집에 먼저 갔지요. 명절 아침 세배를 한 뒤, 아침을 먹고 처가로 떠났어요. 보통 우리 집에서는 하룻밤만 자고 처가에서 며칠을 머물렀는데, 저는 이 정도면 양쪽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했어요.
처가의 명절 당일 모습은 우리 집과 크게 달라요. 아침 일찍부터 아내의 친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들고, 오후에는 아내의 처가 친척들이 집을 찾아요. 문제는 장모님이 혼자 명절을 준비하셔야 한다는 거예요. 아버님도 함께하지만, 주로 장모님이 도맡아하시죠.
전 부치는 일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명절 오후에 처가에 도착하면 제가 할 일은 없어요. 이미 장모님이 음식을 다하셨으니까. 꼬치전을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하는 못난 사위 덕분에, 장모님이 만들어야 하는 전은 하나 더 늘었지요.
그렇게 몇 년이 흘렀어요. 언젠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 둘을 둔 엄마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데, 딸 둘을 둔 장모님은 왜 두 사위와 명절 음식을 준비할 수 없을까. 홀로 대식구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어요. 집안일도 육아도 저와 아내가 평등하게 하는 것처럼, 명절도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난 추석 때 처가에 먼저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바로 실행에 옮겼던 거예요.
그런데 아내는 엄마가 어떻게 반응할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에요. 추석 연휴 직전에 사과와 배 한 박스를 사들고 갔잖아요. 아내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엄마는 조금 시큰둥했던 것 같아요. 혹시 처가에 먼저 가는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이내 그런 생각은 흩어져버렸지요. 설마 그럴까 하고요.
추석 때 처가에 먼저 가보니...추석 때 처가는 참 바빴어요. 저는 장모님의 조수 역할을 했어요. 장모님을 따라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죽도시장에서 장을 보고, 함께 전을 붙였죠. 아이를 돌보느라 많이 도와드리진 못했지만, 할 일이 참 많다는 걸 느꼈어요.
아내의 처가 친척들과 캠핑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아내의 외삼촌·숙모·사촌동생들과 특별한 밤을 보냈는데, 장모님 표정이 참 좋아보였어요.
뒤늦게 찾은 우리 집에서, 엄마는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어요. 엄마도 제 선택을 이해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많이 서운해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머리가 복잡해지더라고요. 엄마와 이런 얘기를 터놓고 해야겠다 싶다가도, 괜히 서로 마음만 다칠 것 같아서 말을 못 꺼냈어요. 그랬더니 벌써 또 한 번의 명절이 찾아왔네요.
제가 어렸을 때, 엄마도 며느리였죠. 우리 집은 항상 명절 때 할머니 집에 먼저 갔어요. 그런데 차로 20분 거리인 외할머니 집에는 안 가거니, 잠깐 다녀왔던 것 같아요. 그땐 단순히 외갓집에 왜 안갈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참 서운했을 것 같아요.
엄마도 엄마의 엄마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 함께 명절을 준비하고 싶으셨을 텐데.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엄마는 아빠나 할머니한테 친정에 먼저 가자거나 친정에 며칠 머무르자는 얘기를 할 엄두를 못하셨을 겁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명절 때 본가에 먼저 가는 사회 분위기는 비슷하고, 며느리들은 홀로 명절을 준비할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엄마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에요. 바뀌어야지요. 아들과 딸을 둔 부모의 명절이 서로 달라선 안 되잖아요.
엄마. 이번 설에는 우리 집에 먼저 갑니다. 제가 전을 다 부치고 나물을 무칠 테니까, 엄마는 쉬엄쉬엄 하세요. 설 끝나고 2주가량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데,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우리 집에서 육아를 도와주기로 하셨어요. 참 죄송한 일이지요. 추석 때는 처가에 먼저 가려고 해요.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요. 그리고 엄마. 우리 여름에 여행 가요. 엄마 환갑이니까, 좋은 데로 가요.
엄마의 생각이 바뀌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걸릴 거예요. 기다릴게요.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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