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내가 가면 벗은 이유... 아무도 날 못 건드려!"

[인터뷰] 대한항공 촛불집회에서 얼굴 공개한 유은정 부사무장

등록 2018.07.25 10:05수정 2018.07.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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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항공 촛불집회에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공개한 유은정 부사무장.
대한항공 촛불집회에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공개한 유은정 부사무장.이희훈

"후회요? 전혀 안 해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표정 또한 굳건했다. 그는 자신을 "나약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도, "당당해지니 아무도 나를 못 건드리는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유은정 부사무장(43)의 이야기다.

유 부사무장은 지난 14일 청와대 앞에서 진행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공동 집회'에서 가면을 벗었다(관련기사 : 벤데타 가면 벗은 승무원의 꿈 "나도 평범한 아줌마로 살고 싶다"). 4월 초 시작된 이른바 '대한항공 사태' 이후 최근 새로운 직원연대노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유 부사무장은 처음 얼굴을 공개한 직원연대노조원이었다.

유 부사무장은 가면을 벗던 당시의 상황을 "목욕탕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느낌,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곳에 나서는 기분"이라고 떠올리며 웃음을 내보였다. 그러면서 "얼굴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웠고 슬슬 위축되더라"라며 "그게 회사가 원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그들과 정면 대응할 용기가 생겼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요샌 혼자 밥 먹는다, 외롭다"라며 농반진반의 말을 건네면서도 "아군을 많이 얻었다"라고 얼굴 공개 이후의 상황을 전했다. 이어 "가면을 벗은 후 내 옆에 다가오는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조용히 응원해주는 사람은 많아졌다"라며 "우리는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 아이의 엄마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유은정 부사무장을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유은정 부사무장을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이희훈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유 부사무장은 "회사가 (나처럼) 나약한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4월 초 '조현민 물세례 사건' 이후 만들어진 익명 채팅방에 '인피닛'이란 닉네임으로 접속했고, 이후 설립된 대한항공직원연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직원연대가 노조를 만들자 곧장 가입해 지금은 직접 노조 홍보에도 힘쓰고 있다(관련기사 : 물세례 갑질 후 세 달, 대한항공에 새 노조 생겼다). 그 와중에 회사에 불려가는 등 약간의 부침을 겪기도 했다(관련기사 : '노조 홍보' 직원 소환한 대한항공, "조현아 남편 성형외과 홍보는?")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유 부사무장은 지난 3개월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정신없이 보냈어요. 일과 가정에 힘을 나누는 것도 힘든데 이 일까지 생겼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 3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해낸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많은 변화가 일어났잖아요."

유 부사무장이 얼굴을 공개한 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앞서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어플)에서 누군가에 의해 그의 이니셜이 거론됐고, 급기야 기내식 사태 이후 만들어진 아시아나항공 익명 채팅방에 그의 실명이 담긴 회사 인사기록까지 올라왔다. 유 부사무장은 이를 회사가 벌인 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얼굴 공개를 고민하던 그가 "내가 먼저 떳떳하게 나서자"며 가면을 벗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그동안 인간 취급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살고, 겁주면 겁주는 대로 살고... 근데 그건 정말 옛날 방식 아닌가요. 회사가 그런 방법으로 직원들을 대하는 건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저도 사실 마음이 약한 사람인데 인사기록이 공개된 것을 보고 '뭐야, 쟤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나더라고요. 지금은 그렇게 협박한다고 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유 부사무장은 가면을 벗은 뒤 생긴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다"라고 힘 있게 이야기했다. 그는 "사실 익명 채팅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마구 쏟아져도 막상 회사에 가면 조용했다"라며 "하지만 요샌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리더라, '샤이 객실(승무원)'이라 그렇지 모두 마음 편히 비행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어느 날은 회사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데 뒤에서 '인피닛 맞죠?'라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회사에서 저를 감시하는 줄 알고... 근데 그분이 '저도 블라인드에서 여러 번 정지 먹었어요'라고 웃더라고요.(직원연대는 회사가 블라인드 내 일부 직원들을 조직적으로 신고해 이용을 정지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엊그제는 승무원들과 모여 있는 자리에서 제가 가면을 벗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저인지 모르고(웃음)... 그 동영상을 거론한 직원이 '보면서 눈물이 났다'라고 말하길래, 제가 '그게 접니다'라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랬더니 모두가 '소름 돋는다'라며 웃더라고요. 그러면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어요. 그 동영상 보고 오랜만에 마음 편히, 시원하게 비행했대요."


'연대'라는 말

 "얼굴을 공개하면 어떻게 될까 정말 궁금했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당당하니까 회사는 저를 무시하지 못해요."
"얼굴을 공개하면 어떻게 될까 정말 궁금했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당당하니까 회사는 저를 무시하지 못해요." 이희훈

유 부사무장이 회사를 바꾸기 위해 적극 나선 데에는 박창진 사무장의 영향이 컸다. 그가 육아휴직 후 회사에 돌아왔을 때, 박 사무장도 땅콩회항 사건 이후 복귀해 함께 복직 교육을 받았다. 유 부사무장은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게 박 사무장이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교육원과 본사가 따로 있어서 밥을 먹으려면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거든요. 아침부터 교육받고 시험 보고 이러면 정말 배고파서 힘들어요. 근데 항상 박 사무장은 혼자 있더라고요. 그땐 박 사무장 옆에 가면 '너 저 사람이랑 친해? 왜?'라는 시선이 쏟아질 때에요. 저도 멀리서 지켜봤으니 비겁했죠. 그러다가 박 사무장님과 파리 비행을 함께 갈 일이 생겼고 그때 식사를 같이하게 됐어요. 돌아오는 길에 말씀드렸죠. '사무장님을 잘 모르지만 제가 돕고 싶다고'요."


유 부사무장은 박 사무장과의 비행 직후, 대한항공 직원들이 오래전부터 겪고 있던 휴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놓고 활동할 순 없었지만, 100일 넘게 쌓여 있는 휴가 잔여일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료를 모았다. 처음엔 제보를 꺼리던 직원들이 나중엔 조금씩 자신의 남은 휴가 잔여일수 기록을 갈무리해 보내줬다. 그래서 결국 휴가 문제를 기사화할 수 있었고, 유 부사장의 말을 빌리면 "하늘이 내려준 기회처럼" 조현민 물세례 사건이 터져 지금에 이르렀다.

유 부사무장은 새롭게 만든 직원연대노조에 많은 이들이 동참해주길 바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원연대노조가 힘을 갖게 되면 회사가 바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현재 대한항공에는 직원연대노조와 같은 성격(조종사 외 직원들이 가입)의 일반노조가 존재한다.

"그동안 경영진과 일반노조는 서로 한 몸이라고 생각해왔어요.(일반노조는 이른바 어용 논란에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우리를 지켜줄, 우리의 힘든 점을 들어줄 노조가 필요했고 불편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이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 있는 노조가 필요했어요. 회사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게 우리 직원연대노조입니다."

그는 어쩌면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직원들에게 "오히려 당당해질 수 있다, 함께 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나쁜 짓 하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서 권리를 찾자는 것 아닙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정치권, 언론, 시민들까지... 그런데 우리가 안 움직여서 되겠습니까. 저도 혼자 외롭게 지내는 거 싫거든요. 혼자서 밥 먹는 거 정말 못하고요. 그런데 얼굴을 공개하면 어떻게 될까 정말 궁금했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당당하니까 회사는 저를 무시하지 못해요.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어요.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를 만들어낸다면 우린 역사에 남을 겁니다."

인터뷰 말미, 유 부사무장에게 최근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물었다. 그는 "연대라는 말이 너무도 좋은 것 같다"며 짧지만 강한 어조의 답을 내놨다.

 "그동안 항공업계는 짧은 시간 내에 급속도로 발전했어요. 그 과정에서 오너가 원하는 대로 법과 원칙이 굴러갔고요. 이젠 노동자가 서로 연대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동안 항공업계는 짧은 시간 내에 급속도로 발전했어요. 그 과정에서 오너가 원하는 대로 법과 원칙이 굴러갔고요. 이젠 노동자가 서로 연대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이희훈

"함께 상생하고 싶어요. 이전처럼 서로를 짓밟고, 노선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당히 소비자의 선택에 맡기며 같은 업종끼리 어떻게 하면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 교류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항공업계는 짧은 시간 내에 급속도로 발전했어요. 그 과정에서 오너가 원하는 대로 법과 원칙이 굴러갔고요. 이젠 노동자가 서로 연대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대한항공 #승무원 #가면 #아시아나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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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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