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된 서울시 보라매병원 의료진이 유리벽으로 된 상자에 장갑이 달린 구멍을 통해 영아를 돌보는 인큐베이터와 유사한 구조로 만들어진 '글로브-월(Glove-Wall)' 방식의 검체채취실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서울시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풀 꺾인 2015년 11월 19일 시의 방역 대응 6개월을 평가한 298쪽의 '메르스 백서'를 내놨다. 이 백서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부터 김창보 시민건강국장(현 서울시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나백주 서북병원장(현 시민건강국장) 등 5년 뒤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도 뛰고 있는 사람들의 회고담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눈길을 끈 것은 최근까지 서울의료원을 이끌었던 김민기 전 원장이 2015년 6월 23일 오후 4시 10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보건의료를 최소의 비용을 들여서 최대의 효과를 보려고 하는 효율성만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서울의료원 만든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음압격리병상을 써봤다. 그동안 '예산낭비다',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지만 지금 이 위기 상황에서 메르스 치료 최전선에서 잘 싸우고 있다. 공공의료는 이런 부분이 아닐까 한다. 비용은 다소 들 수 있지만 급한 시기에 꼭 필요한 기능을 하는."
서울시의 백서는 메르스 사태에서 중앙정부보다 더 발빠르게 대응한 시의 대응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묻어났지만, 공무원들의 '공문철 묶음' 이상의 가독성이 있다. 당시 상황을 날짜별로 꼼꼼히 보여주면서 서울시의 재발 방지책과 전문가 인터뷰, 현장 종사자 후기를 곁들였다.
특히 책임있는 컨트롤타워 구축,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 위험정보 공개 등의 원칙은 이후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됐다. 백서에서 '메르스'를 '코로나19'로 바꿔놓으면 지금의 서울시가 어떤 방역을 해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시감을 주는 대목들이 많다.
이 가운데에서도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은 코로나19 국면에서 수치로 그 성과가 입증된 분야다.
서울 확진자 5명 가운데 4명, 공공의료 인프라 덕 봤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1월 23일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한 이래 4월 24일까지 약 석 달 동안 628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80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온 대구·경북을 제외하고는 경기도(658명)와 함께 가장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서울에는 시립병원 12곳 있는데 이 가운데 서울의료원(187명)과 보라매병원(138명), 서남병원(100명), 서북병원(21명) 등 4곳에서 서울 확진자의 71%에 달하는 446명을 치료해 225명을 퇴원시켰다.
경증 또는 무증상 확진자들을 위해 노원구 태릉선수촌에 임시로 만든 생활치료센터에 들어간 인력(21명)까지 합하면, 확진자 5명 가운데 4명이 서울의 공공의료 인프라 덕을 봤다는 계산이 나온다.
반면, 큰 병이 나면 시민들이 으레 찾는 서울의 이른바 '빅4 병원'의 확진자 수용 인원은 20명에 미치지 못했다. 서울대병원 11명, 서울아산병원 4명, 신촌세브란스병원 2명, 삼성서울병원 1명 등이다.
물론 이는 '빅4 병원' 의료 인프라가 서울 시립병원들보다 뒤처져서 생긴 현상은 아니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 2015년 응급실에 입원한 메르스 확진자 1명이 80여 명을 감염시키는 바람에 병원이 부분폐쇄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서울시는 코로나19 방역 과정에서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형병원의 기능 자체가 타격받을 것을 우려해 확진자들을 서울 시립병원에서 치료받도록 적극 유도했다.
서울시내에 마련된 92개 선별진료소 가운데 민간병원 25곳을 제외한 67곳은 구청 보건소 또는 국·공립병원에 마련됐다. 선별진료소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13만3650명 가운데 9만8934명(74%)이 이들 공공 진료소를 이용했다.
박원순 시장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치료받나?"
공공의료 인프라 구축은 '공짜'가 아니다. 서울시가 시립병원 12곳을 운영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투입한 세금은 2930억 원. 매년 977억 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홍준표 지사 시절인 2013년 진주의료원 폐원 이후 인구 330만 명의 공공의료를 병상 300개의 마산의료원 하나로 감당해야 하는 경상남도에 비해서는 좋은 조건이지만, 서울시도 늘 '예산 낭비', '비효율'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정치인·행정가 출신과는 달리 시민운동을 오랫동안 해왔던 서울시장 박원순은 처음으로 시민의 입장에서 공공의료 문제를 들여다봤다.
"서울에 시립병원이 10개가 넘는데 적자가 나는 병원들이 있다. (지방의료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많아지면 주민들의 의료 공공성이나 무상지원 등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 (2013년 4월 5일 국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디서 치료받으란 말인가? 서울 시립병원 13곳의 적자가 800억 원에 달하지만, 더 투자할 것이다." (2014년 7월 3일 광주시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서울시 시립병원들이 모두 적자이지만, 이는 시민이 낸 세금을 시민에게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시립병원에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 (2019년 6월 4일 서남병원 '서울케어' 현판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