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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에 채식... 왜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거죠?

고기 섭취를 줄이고 찾은 채식의 즐거움... 그리고 찾아온 내 삶의 변화

등록 2021.03.22 17:24수정 2021.03.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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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자가 왜 2~3일에 한 번만 사냥을 하고 나머지는 잠만 자는 줄 알아? 고기를 먹어서 그래."


우적우적 풀을 씹어대는 나를 보고 있던 딸이 야무지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초식동물은 풀만 먹으니까 하루종일 먹는 건데 엄마 그러다 진짜 코끼리 될 거 같아. 그냥 고기를 먹어."

그래, 내가 생각해도 정말 너무 했다. 먹는다고 기운이 나는 것도 아닌데 배가 고파 자꾸 먹고만 있으니 보다 못한 딸아이가 면박을 준 것이다.

일을 저지르고 보는 성격은 아닌데, 언젠가 해야 될 일 같았다. 왜 그런 일이 있지 않나. 자꾸만 눈에 띄는 일. 아무도 나에게 강요한 적이 없고, 심지어 주변 사람 누구도 함께 하자 독려한 적 없지만 숙제처럼 남겨진 것. 나에게 채식주의는 딱 그랬다.

자발적 채식의 시작
 
 채식 사진입니다.
채식 사진입니다.은주연
 
처음엔 정말 고기를 딱 끊었다. 식구들에게 매일 고기 반찬을 해주면서 고기를 입에 대지 않기란, 그것도 고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그러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글지글 불판에 구워지는 고기의 비주얼을 보고 있노라면, '환경이란 대의가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솟아올랐다.


고기 먹는 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샐러드를 볼에 가득 담아 우걱우걱 먹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맛이 없었다. 그런데 맛보다 더 문제였던 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야채도 먹고 밥도 먹고 과일도 먹는데, 매순간 극강의 허기가 나를 따라다녔다.

육식 금단 현상인가 싶었지만 기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앉았다 일어나는 순간 휘청하는 전형적인 기립성 저혈압 증세까지 찾아왔다. 정말 내가 채식을 고집하다 지구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다 지구를 살리기 전에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존욕구가 뿜어져 나온 어느날, 나는 식구들의 밥상에 함께 마주 앉아 오랫만에 맛있게 삼겹살을 먹었다. 채식주의도 '치팅데이'는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논리를 펴며.

그 날, 내 인생의 가장 맛있는 삼겹살을 먹었다. 고기가 아니라 생명줄 같았던 그 느낌. 내 몸은 육식에 즉각 반응하여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났다. 몸에 활기가 돌고 비로소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고기 한 점 입에 넣자마자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너무나 맛있게 고기를 먹었던 그날의 민망함은 접어두고라도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꼬박꼬박 끼니를 먹었건만, 고기가 들어가서야 비로소 내 몸의 세포들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인 것 같았다.

뇌가 만들어낸 가짜 배고픔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지구가 죽기 전에 내가 죽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희미한 확신이 생겼다. 나는 다시 한번 제대로 채식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최대 미션, 공복감을 해결하라
 
 과카몰리도 맛있는 채식!
과카몰리도 맛있는 채식!은주연

그런데 다시 시작하는 채식엔 좀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채식에도 단계가 있고 또 여러 유형의 채식주의가 존재하는데, 너무 무식하고 단순하게 고기 먹지 않기를 고집했는지도 몰랐다. 일단, 나는 비건이 되기에는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채식에 대한 시야와 범위를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분명 다채로운 식단을 통해 허기와 공복감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 터였다.

먼저 식단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치즈같은 유제품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채식주의 중에서도 락토오보베지테리언(Lacto-ovo-vegetarian)이나 페스코베지테리언(pesco-vegetarian) 같은 경우엔, 달걀이나 우유를 먹기도 한다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단 치즈와 달걀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뇌가 비이성적 흥분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해줄 것만 같았다.

나의 식사는 아침식사와 오후식사. 이렇게 두 번으로 결정되었는데 (이건 나이가 들어 기초대사량이 떨어지는 40대 중년여성임을 감안한 식사량이다) 먼저 아침식사는 한식으로 다양한 나물과 국 또는 찌개, 계란 프라이(일주일에 두 번)을 곁들여 충분히 먹고, 오후에는 채썬 양배추와 토마토, 고구마, 아몬드 슬라이스, 생치즈 등을 썰어 넣어 각종 과일과 함께 충분히 먹었다. 

계란과 치즈를 먹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식단은 한 달째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오후식은 4시쯤 먹게 되는데 생각보다 배부름이 오래 간다. 나를 괴롭히던 그 미칠 것 같은 허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치즈가 주는 만족감이 컸나보다. 공복이 오래 유지되니 다음날 아침 식사가 맛있어졌다.

40년 넘게 이어온 식사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내 몸에 엄청난 충격이고 변화였다. 내 몸과 입맛에도 관성이라는 것이 있는지 육식을 끊은 한동안 힘들었지만 고기에 대한 의존감이 낮아지니 나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봄에는 제철 봄동으로 간식을!
봄에는 제철 봄동으로 간식을!은주연
 
일단 육식을 하지 않으니 과식을 하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되었다. 그리고 신선한 채소의 맛을 알게 된 기쁨과 각종 과일이 주는 다채로운 맛의 향연도 감미로웠다. 당연하게 위와 장의 건강이 따라왔다.

고기를 아예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참는 것이 고통이더니, 고기를 안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고기에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먹고 싶을 때 한 입 먹는 것은 스스로 허용했다. 금기에는 호기심과 욕망이 따르므로, 고기를 금기시 하는 것보다 채식에 대한 즐거움을 높이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비록 식구들은 나를 고기 먹는 '가짜 채식주의자'라고 말하지만, 한 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여러 명의 간헐적 채식주의자들이 환경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어느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나.

거창한 대의로 시작한 나의 채식주의.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만하면 채식 실패담으로는 멋진 결말이 아닌가 싶다.
#채식주의 #실패담 #락토오보베지테리언 #간헐적채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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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고 글쓰는 일을 좋아합니다. 따뜻한 사회가 되는 일에 관심이 많고 따뜻한 소통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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