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규의 명예졸업 소식을 전하고 있는 강원일보(1999)1999년 <강원일보>는 1938년 이후의 행적에 대해 “해림에서 한국인 지원사업에 가담하기도 했다”고 보도했고(강조는 필자), 비슷한 시기 <중앙일보>는 “(최병규는) 고향집에서 3년 동안 거주 제한조치를 받은 후 만주로 가 동포들의 정착 돕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최재형 후보 공보특보단 제공
사실 확인 과정은 엉뚱하게 최재형 후보 측에서 조부의 독립운동 증거로 제시한 1999년의 <강원일보> 보도 기사(<춘천고 최초 항일운동 불지핀 최병규옹(1회) "73년만에 고교졸업장">, 1999. 2. 12)에서 시작되었다. 최재형 후보 측은 해당 기사를 1926년 춘천고보 시절 조부 최병규의 활동이 '항일운동'임을 입증하는 자료로 제시했지만, 논란이 되는 1938년 이후 만주에서의 행적에 대한 단서가 이 기사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당 기사에서 1938년 이후 최병규의 행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은 "해림에서 한국인 지원사업에 가담하기도 했다"고 한 부분이다. 표현이 모호하지만, 비슷한 시기 <중앙일보>가 보도한 <항일운동 퇴학고교생 73년만에 졸업장 받아>(1999. 2. 13)라는 기사를 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중앙일보>는 만주 해림에서의 행적을 "고향집에서 3년 동안 거주 제한조치를 받은 후 만주로 가 동포들의 정착 돕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최병규가 만주로 가서 한 일을 '동포들의 정착 돕기 운동'이나 '한국인 지원사업'이라는 알듯 모를듯한 표현을 동원하여 포장한 점은 있지만, 두 기사 모두 분명한 것은 최병규가 자신의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앞서 보도한 두 기사에서 줄곧 "최병규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간 것이 아니라, 일제의 만주 식민 정책에 호응해 만주에 정착할 조선인으로 구성된 만주개척단을 지원하는 사업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1999년의 언론보도에 등장하는 '동포들의 정착돕기 운동', '한국인 지원사업'이라는 표현은 최 후보 측의 '독립운동'보다는 기자의 의혹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만주에서 최병규가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의혹 제기의 정당성은, 그가 편집위원장을 맡아 1984년에 발간한 <평강군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엔 최병규의 춘천고보 시절 맹휴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만, 1938년 이후의 만주 행적에 대해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자신이 편집위원장을 맡아 제작한 <평강군지>에 맹휴 사건만 싣고 만주 독립운동 행적은 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사망 이후에 등장한 '만주 독립운동'
반면, 최병규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 내용은 2008년 최병규의 사망을 알리는 <강원도민일보> 등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강원도민일보>에는 "고인은 만주로 건너가 조선거류민회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등의 역할을 담당하며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기까지 20여년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보도됐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 대령이 쓴 <바다를 품은 백두산> 역시 2021년 5월에 출간된 점을 고려하면, 최병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은 모두 최병규 생전이 아닌 사후에 나온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선 "아버지(최병규)는 7년간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돼 있다.
최병규의 만주 행적에 대한 내용이 생전과 사후를 경계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는 만주 독립운동 주장이 최재형 후보의 조부 최병규가 아니라 부친 최영섭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