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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2024, 지금 김남주] 은란이네와 은주... TK의 기억

등록 2024.10.09 10:37수정 2024.10.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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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편집자말]
 경북 포항 형산강 주변이 짙은 안개로 덮여 있다. 자료사진.
경북 포항 형산강 주변이 짙은 안개로 덮여 있다. 자료사진.연합뉴스

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소도시에서 자랐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내가 나고 자란 지역을 TK(대구·경북)라 불렀다. 강원도 고향을 떠나 TK 달셋방 신혼살림으로 시작한 나의 부모는 열심히도 살았다.

철강공장 3교대를 하며 운전학원 강사로 투잡을 뛰던 아버지와 딱 한 번 옷 장사를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서울서 떼 온 옷가지를 때아닌 홍수로 몽땅 물에 담가버린 후엔 그저 곗돈만 착실히 부으며 살림만 한 엄마는 여덟 평짜리 연립주택을 거쳐 열두 평 사택, 그다음 대지 오십오 평, 건평 스물다섯 평 사택에 어엿이 입주했다.

철강공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택 단지 사랑방에 세를 들었다. 집주인들은 마당을 좁혀가며 사랑방을 덧지었다. 방 하나와 작은 마루를 내고, 화장실도 만들었다. 마당은 겨우 단풍나무나 백일홍 두어 그루를 심으면 그만일 정도로 좁아졌지만 대신 아기들이 많아졌다.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새로 태어난 사랑방 아기를 보러 놀러가곤 했다.

우리 집 사랑방에 이사를 온 은란이네는 아기가 둘이었다. 늘상 콧물을 달고 있던 첫째 은란이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걸핏하면 옥상을 넘어 지붕을 타고 놀았다. 고작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엄마는 그런 은란이를 볼 때마다 간이 졸아붙는다며 기겁을 했다. 그러면 은란이 아빠가 지붕에 또 올라 은란이를 잡아왔다.

그런 은란이네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고구마를 베어 먹다 잠든 어느 밤이었다. 줄여놓은 TV 소리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섞였다. "우리를야 아주 깜빡 속였네. 충청도라 하드니 전라도였어. 어쩐지 은란이 고거 하는 짓이 보통이 아니더만. 가시나가 지붕 뛰댕기는 거 좀 봐요." 아버지는 목소리를 엄마보다 더 낮추었다. "사람들한테 암말도 하지 마라. 말 돌면 시끄럽다."

우리 동네에서 전라도 출신에게 사랑방을 내어주는 집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전라도 출신 신혼부부들은 충청도쯤으로 고향을 속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앞집 언니는 전라도 남자를 신랑감으로 데려왔다가 하마터면 다리 몽둥이가 부러질 뻔했다.

앞집 아줌마는 광광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저년을 어떻게 공부시켰는데, 전라도 남자를 집구석에 데려오노!" 아줌마의 통곡이 골목을 타고 넘었고,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찼다. "저 집은 자식 농사 다 베렸네, 다 베렸어." 앞집 언니가 끝내 그 전라도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는 이제 와 기억나지 않는다.


은주의 비밀

나는 철강공장 회장과 대통령 사진이 나란히 걸린 학교 교실에서 공부했다. 스무 살이 넘어 사귄 나의 친구들은 그런 나의 옛 기억을 의심했다. "설마! 교실 벽에 그런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도리어 놀란 내가 되물었다. "너희들은 안 그랬어? 그럼 누구 사진이 있었어?"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사진 같은 거…… 없었는데?" 나야말로 믿기 어려웠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교무실로 불렀다. 새로 전학 온 친구를 잘 챙겨주라 당부하기 위해서였다. "광주에서 왔어. 힘들 테니까 네가 잘 챙겨줘야 해. 잘할 수 있지?" 새 친구가 광주에서 왔다는 건 모두에게 비밀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오히려 전학생 은주였다. 광주에서 전학을 왔다는 것이 왜 비밀이 되어야 하는지 은주는 의아해했다. 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네가 말하던가." 그런 내 대답을 듣고 난 은주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은주와 단짝이 되었다. 아무리 감추어도 새어나오는 그 애의 전라도 사투리가 우스웠고, 점심시간에 우리가 도시락 반찬으로 싸온 노란 콩잎김치가 입에서 씹히지도 않는다며 커다란 눈을 토끼처럼 끔뻑끔뻑하는 것도 재밌기만 했다.

나는 그 애의 집에서 광주의 사진을 처음 보았다. 은주는 내가 단짝이기 때문에 사진을 보여준다고 했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면 안 되는 사진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 처음 알았기 때문에, '김대중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은주가 이상하게 낯설었기 때문에, 그리고 처음 보는 광주의 사진이 너무나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전전긍긍하다 울었다.

그 무엇 하나도 엄마에게 비밀이 없던 나였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은주와 천천히 멀어졌다. 눈을 끔뻑끔뻑하며 나를 바라보던 은주도 더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은주를 멀리한 이유를 나는 여태도 모르지만 은주는 이미 안 모양이었다.

그 무렵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국어 선생님을 수업 도중 형사들이 데려갔다. 드르륵 탕! 교실 문이 열리고 다시 드르륵 탕! 교실 문이 닫혔다. 그 짧은 시간에 국어 선생님은 교실에서 사라졌다. 전교조 가입 교사라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었다.

가끔 교실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도 있었다. 여러 곡이었으나 대개 <의연한 산하>였다. "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치는 강산이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지휘봉을 마이크 삼아 눈을 감고 노래에 빠진 선생님을 보며 우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가슴이 빠개지다니, 무슨 가사가 저래?

며칠 후 국어 선생님이 돌아왔지만, 선생님이 사라지던 날 울고 불며 법석이었던 풍경과는 달리 조용했다. 판서하는 선생님 모르게 친구들은 쪽지를 주고받았다. "저 선생님 빨갱이인 거 맞지?"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냈다. "좀 하지 말라고! 그러다 들키면 어쩔 거야!" 순진하고 마음 약했던 친구들은 나에게 사과했다. "알았어. 안 그럴게. 미안해."

우리는 그렇게 학교를 졸업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아무 일이나 막 벌어졌다고 해도 꼭 거짓말은 아닌, 이상한 TK의 어느 시절이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 김남주의 시 '학살 2' 중에서

그들의 그다음 소식

"요즘 뉴스 좀 봐?" 반찬을 싸들고 우리 집에 다니러 온 엄마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그럼, 보고 있지." "어때? 나라 꼴?" 내 말에 엄마가 푸푸 웃긴 하는데 미간에 주름이 꽝 잡혔다. "아주 내가 뉴스만 보면 속이 절로 터진다!" 원래 TK 부모와 잘 지내려면 정치 이야기 따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큰일은 큰일인 모양이네. 엄마가 그런 소릴 다하고." 내가 낄낄거렸다. 박근혜 탄핵 때도 기겁을 했던 엄마다. "야야, 박근혜가 뭘 그래 잘못했나? 다 밑에 사람들이 해먹고 그런 거를 왜 박근혜한테 다 떠넘기나?" 그랬던 엄마가 이제 와 나라 돌아가는 꼴에 발끈하다니. 고소한 마음도 좀 들었다.

"엄마, 은란이네 기억 나?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전라도 가족." 여든 살 엄마는 곰곰 기억을 더듬는다. "그래, 전라도 사람들이 있었다. 내 그때 진짜 깜짝 놀래가지고……" 아쉽게도 엄마는 그들의 그다음 소식을 몰랐다. 지붕을 뛰어다니던 은란이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했는데. 그들은 언제까지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숨기고 살았을까.

20대 끝자락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삼성전자엘 다녔다. 최종합격했을 때 그의 부모님은 한 달 내내 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샀단다. 그게 그렇게 큰 자랑거리야, 삼성전자가? 내가 물었을 때 남자친구가 대답했다. "야, 나 광주 사람이야. 광주 사람이 삼성을 들어갔다고.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그는 초등학교 1학년 5월, 집 앞 도로 배수구로 졸졸졸 떨어져 내리는 핏물을 기억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은주의 그다음 소식도 모른다. 말수 적던 은주는 나와 멀어진 뒤 다른 단짝을 찾았던가. 그 애의 학교생활은 꽤 외로웠을 것이다. 대학에 진학해 그 소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아마 광주 출신이라는 것은 비밀에 부쳤을 것이다. 장롱 속 커다란 궤짝에 숨겨두었던 광주의 앨범들을 다시는 친구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은 김대중이지 김대중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 소도시를 떠나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저 책상머리에서 1980년 오월, 노골적인 밤 12시를 떠올리는 중년이 되었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김서령 / 소설가. 작품으로 <수정의 인사>, <연애의 결말>, <티타티타>, <어디로 갈까요>,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등이 있다. 작품 목록을 빼고 다른 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직 무엇인지 몰라 허둥거리는 중이다. 부끄럽지만.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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