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을 이해하기 위하여

내 또래 안티조선 세대에게

등록 2003.09.26 13:29수정 2003.09.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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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땐 정말이지 나도 경악했다. 봤다면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시사저널>의 편집장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위악적이지도 않았다. 그건 그대로 그저 날것이었다. 고여있던 침이 거친 목소리 속에 담겨 내 얼굴로 튀어오는 것 같았다. 내 기억에는 아마 옥석논쟁 전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굳이 사실관계를 맞추기 위해 인터넷을 더 돌아다니거나 하지 않겠다. 이 글은 사실의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 이건, 영혼의 키가 부쩍 자라던 그 시절에 '안티조선'을 겪은 나와 같은 또래들에게-참고로 난 83년생 01학번이다- 던지는 일종의 공개서한이니까.


첫 문단을 적어놓고 보니, 저 위에 적힌 2000자 제한이 마음에 걸린다. 다 말해놓고 시작하자. 이 글은 지금은 개정판이 나온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서평이다. 그 형식을 나타내는 단어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가 다 머금어질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그 책을 읽고 쓴다는 점에 있어서 이 글은 서평이다. 그리고 내 본디 계획은, 이 책에 등장하는 김훈의 글 하나를 다 옮겨놓은 후 그것에 기대어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우리(앞서 말했다시피 이 글은 특정 세대에 대한 공개서한으로서의 성격도 지닌다)가 관통해야 했던 시대를 돌아보며 시작하자.

그 때는, 피아식별이 단순해서 좋았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여집합으로서 안티조선과 사회적 정의가 성립하고 있었다. 역으로, '좋아 보이는 가치'는 또 이냥저냥 두루뭉실하게 좋은 것으로만 남아있었고, 그 자체의 맥박과 호흡 때문에 그것들이 쪼개지고 서로 다투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사치스러워 보였다. 사회운동에 동력이 되는 열정은, 단순한 구호에서 그 날개를 펴는 법이다. 이 때는 뜨거웠다. 세상이 단순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요즘 우리가 그때만큼 열정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이 적어도 한 두 단어짜리 구호에 붙잡히지는 않을 만큼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아니, 원래 그랬는데 그걸 이제서야 바로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가장 허탈해지는 이들이 있다면, 가장 낮은 차원에서의 '말의 힘'을 믿고 거기에 삶의 뿌리를 내리는 바로 그런 이들일 것이다. 천박하게는 선동꾼에서부터, 그래, 결국은, 문학하는 사람들 말이다.

예컨대, 김현의 폭력에 대한 성찰을 칭송하는 고종석을, 나는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의 말을 신뢰하여 내가 직접 그 글을 읽어본다는 뜻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문학이 팔리지 않는 이 시대에 문학평론가의 글을, 그것도 철학서적에 대한 그의 독해를 검토하는 것이, 대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김현의 푸코 독해가 오독이건 말건, 별 상관 없다. 그의 글이 옳건 그르건, 이라크에 한국군은 파병될 것이고, 그들은 폭력적 상황과 개인 앞에 직면할 것이고, 그의 글이 옳건 그르건 남은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할 것이다. 그의 글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의 여부는, 폭력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미국과 한국 등 거대 주체 뿐 아니라, 그들에게 반대하는 미시 주체에게마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당신, 김현 읽고 운동 시작했나?

김현 개인을 모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그만치 세상이 바뀌었다는 거다. 실천문학과 순수문학의 대립 구도 따위를 재론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문학 자체가, 실천하기엔 왜소하고 순수해지기엔 비루한 지금의 상황에서 눈 돌리지 말자는 말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들에게는 반감이 들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폄하(!)일 가능성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도 이 말을 꼭 해야 했던 것이, 이 지점에 서야 비로소 김훈이 무엇인지(누구인지가 아니다, 무엇인지다)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글의 계통 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책머리에

김훈의 도저한 허무주의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저 살아내는 곳이고, 그러니 그저 살아내는 와중에 밥을 위해 쓰는 글들은, 자연스럽게 한 자연인인 김훈 자신의 부산물이 될 뿐이다. 그것을 그는 '책머리에'에서 이렇게 표현하며, 이 표현은 우리가 김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이다.

"나는 내 말이 눈물이나 고름처럼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즙이기를 바랐다. 그 분비물로 보편적 진실을 말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그 진물이 내 몸의 일부이기만을 바랐다." -책머리에

그의 마초성은 그의 솔직함이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이윤기의 냄새를 맡았다. 이윤기의 양성평등은 '리모콘 시대'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것'인데(<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등 참조), 그 사실에 대한 반복되는 강조가 오히려 '그것만 아니면 양성이 평등할 이유가 없다'는 숨은 의미로 읽히기도 하는, 바로 그것과 유사한 냄새. 말하자면 김훈은 이윤기보다 더 히피적이고 덜 인문적이다. 그 차이가, 주저 없이 동인문학상을 받는 두 중년 문인의 유사점을 덮어버린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다. 그 차이에 혹해, 젊은 안티조선 세대는 그 유사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윤기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을 난 들어본 바 없다.

다시 김훈에게로 돌아가자. 그의 마초성은 그의 솔직함이고, 그것은 서슴없이 자신의 글을 '분비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동심에 가까운 것이다. 저 표현은 그저 서술이다. 그것도 가장 정확한 서술이다. 동심과 어린이 등이 갖는 긍정적 이미지를 통해 내가 김훈을 어설피 옹호하려 한다고 오독하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난 이런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흘린 액즙과 고름이 서로 섞이고 스미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어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지.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가장 곤고한 글을 나는 썼다." -책머리에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같은 변기에 오줌싸는 어린아이, 내가 반만 코 풀었으니까 이 휴지 나머지에다 니가 코 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공감대. 이 끈적한 이미지에 나는 심한 정서적 반감을 느끼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본문에서 자꾸만 강조하는 '직접성'은, 이런 차원에서 아주 낮게 이해해야 한다.

내가 아프면 너도 아픈 것이고, 내 배가 고프면 네 배도 고픈 것이다. 그의 사회적 글쓰기는 대부분 이런 정도 차원에서 출발하기에, 그의 반 여당적 성격,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역산되는 친 야당적 성격은, 어쩌면 부수현상이다.

김훈이 진짜 '문제적 인간'이 되는 이유는, 이렇듯 직접성을 겨냥하는 삶을 살면서, 그것을 남들과 너무 쉽게 공유하려 한다는 점에 있다. 앞서 인용한 문단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쓰자면, 그래 나는, 우선 내 글을 적어도 '액즙과 고름'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김훈과 함께 섞을 생각도 없으니까. 김훈을 거짓말쟁이의 역설에 빠뜨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그 치열한 '보편성'에 대한 혐오는 김훈 자신의 글 마저도 그저 한낱 넋두리에 지나지 않게 해버린다.

물론 김훈 자신도 그걸 잘 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짜증을 내는 것이다. 중년이니까. 시간이 자기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에 대해 초연할 수는 없는-나는 아직도 죽음을 내 실존의 불가결한 귀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대문 밖의 황천)- 그런 중년이니까. 그의 글을 싫어하는 젊은 독자들 중 일부는, 바로 이런 적나라한 자기 표현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 측면에서라면 김훈은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인간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솔직하다. 자신이 지나가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 마저 숨기지 않고, 그 드러냄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정치적 영향까지도 자기 것으로 가져가려 한다. 어찌 보면 유아틱한 행동이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주인의 도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직접적이고, 살에 바로 맞닿아있지 않은 그 모든 것을 믿지 않기에,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는 글도 결국은 허무한 결론을 맺어버리거나 아주 개인적 차원에서의 실천만을 해법으로 내세우게 된다.

"또 추워진다. 올 겨울 추위는 모질고 길다고 한다. 세밑의 거리에서 구세군 자선냄비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고담준론과 명석한 이론보다 소중할 뿐이다. 다들 천 원씩 넣자." -책임질 수 없는 책임

그러나 우리는 안다. 김훈이 바라는 바 대로 '정치'가 살에 맞닿아버리면, 그것이 얼마나 쉽게 파시즘에 빠져버리는지. 파시즘은 아니어도 정치는, 아주 막말로 채 썰자면 모두의 밥그릇을 놓고 모두 다 함께 왈가왈부 하는 짓이기에, 몸에 와 닿는 개인 개인만으로 그렇게 조화가 이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부의 것은 어부에게 돌리고, 사회의 것은 사회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을.

비록 "그들은 동료의 동작을 보면 그 동작을 받치기 위해서 내가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하는지를 감각을 통해 터득"하더라도, 글쓰는 이는 세상이 어떻게 올바라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굳이 말해야 한다는 것을.

3.

아주 멀리 돌아왔다.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대체 김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서술형으로 대답하는 건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묻자. 자기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 50대 글쟁이가, 그렇게 허무함에 치이면서도 이런 수준의 글을 뽑아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김훈을 옹호하지 않겠다. 다만, 그렇게까지 날을 세우고 잡아먹을 듯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를 이젠, 의심한다. 아직 젊고, 다가오는 시대는 내 몸에 더 잘 맞는 것이기에, 여유롭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라리 그를 그냥 그렇게 살게 하자고.

어쩌면 그는 하나의 기념비일 수도 있다. 역사성의 부재로 인해 학문다운 학문이 발전할 수 없었던 한국에서, 따라서 문학하는 이들이 모든 사회적 담론의 형성과 유포를 짊어져야 했던 한국에서, 그 문예지 시대의 몰락을 눈으로 지켜보며 몸으로 살아낸, 마지막 파수꾼.

이 표현은 사실 적절하지 않다. 내 개인적인 판단에 의하면, 많은 이들은 그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김훈이 쓰러지면 문학은, 적어도 한국의 산문은 거할 육(肉) 하나를 잃을 것이며, 그 신묘했던 영(靈)은 더이상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환갑도 안 넘긴 중년 아저씨를 놓고 못 하는 소리가 없다. 결례를 용서하시길.

말의 힘에 대해, 플라톤은 정색을 하고 호들갑을 떨며, 분노하고 멸시한다. 그 유명한 대화편 국가의 10권에서 느껴지는 정조는, 분노라기보단 오히려 공포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저 시학을 집필할 뿐이다. 그는 분노하지도 않고 멸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대상으로서 바라볼 뿐이며, 결국 그 이후로 사람들은 적어도 예전처럼 말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앙겔루스 노부스> 참조).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운동에 의해 김훈과 그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를 읽고 향유할지언정,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가 신경써야 할 대상은, 그를 그렇게 밀어낸 이 세대, 그리고 그 후의 세대이다.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일이 바로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 내 결론은 결국, 철저히 재미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일 것이다.

손을 멈추고 잠시 자판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무엇을 더 해야 할까? 안티조선이라는 삶의 구호가 그 실천성을 상실한 지금, 김훈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 시대와 세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성찰'이나, 철학자 누구를 '읽어내는' 일 따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핸드폰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수만명의 노동력이 집약된다면, 그 핸드폰을 생산하는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김훈은 계속 콜록거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김훈의 탓도 아니고, 문학의 탓도 아니다. 그냥 시대가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제 나는 김훈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게 됐다. 다만 그의 존재감을, 예전보다 좀 더 충실하게 느낀다. 만약 지금 우리 세대가 김훈이 느낀 허무감을 걷어내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의 존재감은 지금보다 더 큰 부담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다음 세대는 더 많은 소설가와 문장가와 시인을, 그저 미워하게 되는 일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 지점에서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할 온전한 개인으로서 갈라 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김훈을 이해하기 위하여, 더 이상 김훈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 사소한 결심 앞에서, 조금 착잡해진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김훈 지음,
생각의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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