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에게 바다를 선물하고 싶었지

너에게 보내는 편지(1)

등록 2004.05.28 11:56수정 2004.05.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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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4일, 저는 무작정 차를 몰고 청주로 갔습니다. 청주에는 대학교 때의 친구 박 선생이 있지요. 고향이 삼량진이고, 대구에서 국립 사범대를 나온 그는 졸업 직후 느닷없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청북도로 임지를 자원했지요.


이제 나이 오십. 그가 보고 싶어서 포항 죽도시장에서 싱싱한 활어회 한상자 사 들고 그에게로 달려갔지요. 이 글은 돌아와서 그에게 보낸 공개 편지입니다.

1.

그 옛날 자네가
통행 금지가 없는 해방구
충북이 좋다며
믿기지 않는 선택을 했을 때

나는 솔직히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생각했네.

한 3년 살다가
고향 가까운 어디로
분명히 돌아오겠지….


그런데 거기서
자네는 이쁜 부인 얻어
아들 낳고 딸 낳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네.

2.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 자네가 보고 싶었네.

포항 죽도시장 어시장에서
청정 바다 동해 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활어회,
실컷 먹을 만큼 사 가지고
청주를 향해 달렸지.

포항에서 청주,
자네가 사는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3시간 30분.

시속 150㎞의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린 것은
뒷트렁크에 실린 싱싱한 회가
걱정이 되어서만은 아니었네.

3.

충북대학교 사대부고 포함, 연구 학교 경력 8년이라면
외진 시골 중학교 같은 데 가서
한 3년만 고생하면
교감이 될 수도 있는데

신설 고등학교 발령 받아
남들 다 탐내는 부장 자리
기어이 거절하고
오십 나이에
도서실 담당 교사 자청해서
4층 도서실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구입 도서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그.

물처럼 흘러가다가 교감이 된다면 그뿐
물처럼 흘러가다가 교감이 되지 않아도 그뿐이라며
그 물길을 인위적으로 틀고 싶지는 않다던 그.

잠깐 하던 일 멈추고 내 말 좀 들어 보게.

누군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지 않겠나?
누군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울릉도 가고, 산간 외지 자청해서 가는가?
누군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부장 자리 놓고
서로 눈치 보며 경쟁하는 줄 아는가.

자네 이제 한 3년만
산간 외지 나갔다가 오게.
현대아파트 103동 812호
그만큼 오래 살았는데
지겹지도 않나.

한 3년 만
산간 외지 나가서
시골집 방 한 칸 얻어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오게.

거기도 자네가 사랑해야 할
아이들 있네.
진짜로 자네 같은 선생님 기다리는
아이들 있네.

그 아이들과 함께
한 3년만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오게.

4.

그래
어쩌면
자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어찌 자네가 내 말 듣고
산간 외지 자청해서 가겠나.
안 갈 줄 알면서도
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자네가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도 몰라.
잘 설명되지 않는 어떤 비애감 때문인지도 몰라.

5.

어제 내가
청정 바다 동해에서
금방 잡아 온
싱싱한 활어회를 사 간 것은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자네한테
바다를 선물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

청주에는 바다가 없잖아?

텅 비웠기에
오히려
충만한
바다….

그 바다를 자네와 함께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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