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며

가을에 심는 씨앗

등록 2004.10.01 11:32수정 2004.10.0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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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나뭇잎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린다. 낙엽이 한두 잎 떨어지는 수영장의 열탕에 앉아서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물기를 한껏 머금고 빛나던 검푸른 잎이었건만, 이제는 그 열정적인 몸짓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이다. 가을이 오면 무엇인가 마무리해야 되는 것이 있는 것 같아 항상 아쉬운 생각이 든다.


a 상점에서 만난 가을

상점에서 만난 가을 ⓒ 정동순

기온이 들쭉날쭉해 칼칼해진 목에 스카프를 칭칭 두르고, 국화 화분 몇 개라도 거실에 들여놓고 가을을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슈퍼마켓 진열대에는 줄줄이 늘어선 노랗고 불그스름한 소국들과 주황색의 호박들과 허수아비가 서 있다. 소국들의 향기가 진하다. 바짝 마른 공기에 실린 국화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그런데 향기가 화려한 국화꽃 옆으로 화려한 튤립이나 노란 수선화 꽃이 눈에 들어온다. 뜻밖에 보이는 봄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진짜 꽃이 아니라 화려한 꽃 사진이 붙은 상자들이다. 상자 안에는 양파 망 같은 것에 구근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

노란색 수선화가 그려진 상자에는 연한 밤색의 마늘통보다 약간 큰 구근들이 담겨져 있다. 밝은 밤색 껍질에 싸여 동그란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구근들은 튤립 꽃을 피울 녀석들이다. 구근과 꽃의 생김새가 그 중에 가장 닮은 것 같다. 마늘쪽이 말라비틀어진 것 같이 쭈글쭈글한 녀석은 화려한 아네모네 꽃의 구근이라고 했다. 상자마다 담긴 구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신기하기만 하다.

‘봄에 꽃을 보려면 지금 구근을 심으세요!’ 친절한 설명서에는 구근을 심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이 꽃들은 봄에 심어서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꽃들이 결실을 맺는 계절에 구근을 심어 두어야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가게의 진열대에는 가을에 심는 구근 화초로 아네모네, 튤립, 수선화, 스노우드랍, 히아신스 등이 있었다. 봄에 심는 구근 화초인 칸나나 글라디올러스와 달리 이 구근 화초들은 여름 동안에 휴면하고 가을부터 활동을 개시해서 싹과 뿌리를 뻗기 시작하여 봄에 꽃이 핀다고 한다.


나는 국화꽃 화분을 사려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화려한 봄꽃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 올망졸망한 구근들이 겨울동안 땅속에서 긴 어둠과 추위를 견디고 마침내, 겨울의 마지막 자락을 쑥 뚫고 올라오는 상상을 했다. 겨우내 웅크리고 지낸 사람들에게 허리를 쫙 펴고 꽃향기를 맡는 기쁨을 주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하니 대견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긴 겨울을 겪어야만 제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어디 이런 꽃들뿐이랴. 보리와 밀도 그렇다. 지금은 수익성 때문에 많은 농부들이 심는 것을 포기했지만 보리와 밀이 자라던 겨울 들판은 또 하나의 농촌 풍경이었다. 차가운 북풍과 눈보라 아래서 낮게 엎드려 조금씩 제 싹을 키워갔던 것이다. 어렵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겨울을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봄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을 것이다. 혹한을 탓하지 않고 그 아래서도 꿋꿋이 자신을 키워갔던 보리가 있던 시절이 그립다.


그 시절 농부들은 알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났다고 해서 마냥 수확의 기쁨에 차 있기 보다는 오는 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봄에도 누렇게 들판을 수놓으며 익어가는 보리와 밀은 여름을 지낼 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많은 사람들은 가을에도 씨앗을 심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이 가을에는 국화꽃 대신에 수선화와 튤립 구근들을 사야겠다. 또 다른 계절을 위하여 비밀 하나를 화분에 숨겨두고 긴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남이 모르는 무엇인가에 눈길을 주고 마음 가는 곳이 있다면 쓸쓸하지 않게 긴 겨울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봄이 되면 그 녀석들이 화사한 얼굴로 깜짝 선물을 전해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도 넉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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