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고 밟혀도 되살아나는 패랭이꽃처럼..."

의식불명 9년 끝에 얻은 60명 아이들의 '큰어머니' 석가화씨

등록 2004.12.21 17:37수정 2004.12.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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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민요가수 석가화(48)씨.

민요가수 석가화(48)씨. ⓒ 평화뉴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거죠. 그 고통과 아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이니까요."

낮에는 구제옷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30명 아이들의 어머니로, 주말에는 민요가수로 무료공연을 하는 석가화(48)씨. 석씨는 "척추장애 때문에 마음껏 걷는 것도 힘들지만 이런 고단한 생활 속에서 느끼는 기쁨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대구지역에서 20년 가까이 민요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석씨는 시내 구 자유극장 건물의 구제품 옷가게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2년 전 오갈 데 없는 10대 청소년들과 가족이 되면서 석씨가 택한 길이다.

그동안 양로원을 비롯해 고아원과 장애인시설, 교도소 등에서 무료공연을 하며 소외된 이웃을 도와왔던 석씨는, 지난해부터 60여명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로 살고 있다.

의식불명 9년, 민요가수로 새 출발

척추장애를 안고 지역의 민요가수에서 여러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기까지, 석씨는 녹녹치 않았던 그동안의 고된 여정을 풀어냈다.

지난 1957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시조창과 가야금 등을 배웠다. 석씨는 노래도 잘했지만 무용이 너무나 좋아서 고전무용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등록금을 제대로 못 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지만, 석씨는 기어코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해 무용을 전공했다. 졸업한 뒤에는 결혼도 해, 건강한 사내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아기가 100일을 지났을 무렵 석씨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으로 9년을 살았다. 불가사의하게도 어느 순간 의식을 회복했지만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엄했다. 척추를 다친 후유증으로 남들처럼 오래 걷는 것은 불가능했고, 남편과는 저절로 이혼이 된 상태였다. 젖도 제대로 물려보지 못한 아이는 초등학생으로 훌쩍 자라 있었다.

"남편한테 버림받고 몸도 마음껏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이 있었기에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욕과 희망이 생기더군요."


석씨는 우선 친정이 있는 대구로 내려왔고, 그때부터 민요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연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연습 내내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공연이 끝나면 척추가 아파 와 울면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이런 그가 남을 위해 공연하기 시작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자기가 먹을 밥까지 남한테는 챙겨주는 분이었어요.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어머니를 이해 못했지만 어머니는 항상 '너도 사람들을 많이 도와라. 그럼 마음이 부자가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석씨의 어머니는 암투병 끝에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석씨는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지금까지 10년 넘게 무료공연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양로원이나 장애인시설, 교도소 등 위문공연을 다니면서 석씨는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방법을 터득했다.

끼니때마다 약을 달고 사는 것은 물론 지금도 사흘에 한 번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오히려 고통을 참고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속에 진정한 기쁨을 얻고 있다.

대구아트홀의 '큰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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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뉴스

이런 활동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4월 구 자유극장 건물 3층에 들어선 소극장 '대구아트홀'에서 본부장을 맡으라는 제안이 들어왔고, 청소년을 위한 무료 국악 강연을 해달라는 말에 흔쾌히 일하게 됐다. 대구아트홀은 연극이나 무용 등 공연을 위한 소극장이었지만 동시에 청소년을 위한 무료 강의를 열기 위해 건물 주인이 무상으로 제공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노래와 무용, 국악 등 무료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온 청소년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워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게다가 소년소녀가장과 교도소를 나와 갈 곳 없는 아이들까지 하나둘 돌보다 보니 어느덧 60명이 대구아트홀 연습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됐다.

석씨는 당장 아이들 식비와 수도요금, 전기요금 등 생활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낮에는 구제 옷가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씨가 공연을 열어 자금을 마련했고, 아이들도 버려진 종이를 주워 팔아 힘을 보탠 결과 대구아트홀 건물 2층을 가게로 임대할 수 있었다.

"이곳은 아이들과 함께 마련한 가게예요. 장사로 생활비도 마련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도 하나 더 늘어난 셈이죠."

평일에는 가게 일을 하고, 주말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전해줄 옷을 준비해 공연을 간다. 남는 옷이 없어 빈손으로 가야할 때는 미안함에 가슴이 아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활동에 아이들이 함께 하면서 삐뚤어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석씨는 어머니로서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전문가들에게 부탁해 하루 2시간씩 수업을 하고 나면 강습료로 줄 수 있는 커피 한 잔뿐이었지만 그렇게 서로 배우고 의지하며 가족을 이룬 끝에 절반 정도는 직장을 찾아 독립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어쩌다가 만난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아이들, 내 아이들이라고 생각해요."

보금자리 마련 위해 '사랑의 콘서트'

최근 석씨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다가왔다. 새로운 건물 주인이 이 건물을 공매에 넘겨 보증금조차 돌려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소극장 대구아트홀 자체가 폐쇄되는 것은 물론 그동안 꾸려온 아이들과 석가화씨의 가정도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아이들 절반 정도는 자립한 상태지만 남은 아이들 30여명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언제 쫓겨날지도 몰라 석씨는 매일 저녁 연습 시간을 며칠째 눈물로 보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저를 대구아트홀의 '큰어머니'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책임지지 못하는 어머니는 엄마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너무나 힘이 들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가족은 반드시 지킬 거예요."

석씨는 다음해 3월 신곡발표를 앞두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 마지막 앨범을 발표하고, '사랑의 콘서트'를 열어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생각이다.

"가화야. 그대 가화여. 항상 이마에 예절이 있고, 눈에는 슬기가 있고, 입에는 친절이 있고, 가슴에는 진실이 있고, 손에는 노동이 있으라."

"밟히고 밟혀도 다시 살아나는 패랭이꽃이 좋다"는 석씨는 오늘도 손수 쓴 좌우명을 소리내 읽으며 아이들과 함께 할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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