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로 잘 알려진 김좌진 장군(왼쪽)은 22세 때 군자금 모금혐의로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가운데)는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5세 때 일본 육사를 졸업했던 지청전(오른쪽)은 박정희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떳떳한 일본 육사 출신 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은 한때 기독교계 학교 교직에 있었고 잘나가는 연초회사 중국지점에서 근무했었으나, 나라독립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뛰쳐나와 서울로 잠입,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26세). 다시 그 이듬해 1922년 3월 상해 세관 부두에서 시찰 나온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살해에 실패, 체포돼 복역 중 감형 석방되었으나 미행하던 일경에게 피살된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전투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김좌진은 도산과 함께 세운 서북학회의 오성학교 교감을 역임했지만, 군자금 모금혐의로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할 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부유한 명망대가 출신인 그는 조국독립이라는 대의를 안고 이후 만주로 망명,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 80리 계곡에서 1주일동안 일본군 5000여명을 맞아 10여 차례의 대공방전 끝에 3300여명의 일본군 살상이라는 쾌거를 식민지 조국에 안겨주었지만,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30년 추운 겨울 한 밀정의 흉탄에 이국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1926년 12월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철도회사를 찾아가 권총을 난사, 일인들을 사살한 후 추격하는 일경에 맞서다 지녔던 총으로 자결한 나석주는 이미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의열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다.
우리에게 독립운동가 이청천으로 더 잘 알려진 지청천은 그의 나이 25세 때 일본 육사를 졸업, 후에 보병중위로 복무했으나 곧 1919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우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40년대 중경 임정 시절에는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항일전을 수행한 '떳떳한 일본 육사 출신 군인' 중 한 사람이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인물 중 하나다. 정주신안소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일본 유학 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된다. 그러나 그는 일본제국군인임을 거부하고 같은 해 7월 동료 3명과 함께 배속돼 있던 쓰가다 부대를 탈출한다. 그리고 이들이 임천의 중국군관학교를 거쳐 50명이 함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걷는 6000리의 대장정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러나 광복군 중위 장준하도 해방조국에서 여생이 순탄치 못했다. 박정희로부터 세번씩이나 구속되어 옥살이를 했고, 결국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