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자님삼인출판사
흔히 기지촌은 미군을 좇아 미군기지 주변에 모여든 부도덕한 여성들의 매춘 공간으로 여겨왔고, 그들은 '양공주', '양색시'라는 표현으로 업신 여김을 당해왔다. 이들은 성매매라는 위계에서조차 밑바닥으로 전락한 여자로 취급되었으며, 이는 기지촌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에 대한 터부로도 이어졌다.
1945년, 이 땅에 미군이 첫 발을 디딘 이후, 동두천ㆍ의정부ㆍ오산ㆍ평택ㆍ부산 등 전국 18개 도시에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 기지촌이 들어섰고, 현재까지 30만이 넘는 여성들이 기지촌을 거쳐갔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지촌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공간이었다. 아니 여전히 잊고 싶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최근 주한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한 후 기지촌 주변이 들썩거리고, 지역 경제와 주민 보상, 환경 문제 등 변화를 예측하는 다양한 기사와 성명이 발표됐지만, '기지촌 여성'들과 그 성 산업 변화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김연자씨는 1963년 스물한 살에 동두천 미 7사단 주변의 기지촌에 들어간 이후 송탄과 군산 아메리카 타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보낸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기지촌 정화 운동, 혹독한 성병 검진의 고통, '담요 부대', 팀스피리트 훈련지로의 원정 매춘 등 국내외적인 정치 상황의 틈바구니 속에서 벌어진 한국 기지촌의 굵직굵직한 역사가 이 책 안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윤락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군수, 보안과장, 평택군청 복지과장 등이 기지촌 여성들을 애국자라고 부추기며 미군에 대한 예절 교육과 영어 교육을 시키는 모습, 팀스피리트 훈련지에까지 따라와 임시 보건소를 세워놓는 관리들의 모습, 개인이 땅을 사서 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기지촌 주식회사 군산 아메리카 타운은 기지촌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양성화되어 온 공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연자씨는 1970년대에 송탄과 군산 아메리카 타운의 여성 자치회에서 부회장과 회장을 하면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미성년자들이 기지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뛰어 다니고, 기지촌 여성들이 무엇보다 괴로워한 성병 검진 과정에서의 폭력성에 항의해 검찰청과 법정을 드나들다 집을 날려 빈털터리가 되기도 한다. 그는 몸값을 내리라는 미군들의 요구에 맞서, 미군에 의한 동료들의 억울한 죽음에 맞서 엄혹한 계엄령 아래의 군사 독재 시대에 미군들과 맨몸으로 맞서 싸운다.
1977년 군산 아메리카 타운에서 미군에 의해 동료 이복순과 이영순이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김연자씨를 필두로 한 타운 여자들은 미군들과 대치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법정에 나가 필사적으로 진술한다. 그리하여 결국, 1967년 한·미 행정협정을 맺은 이후 한국 법정 최초로 미군 범죄에 무기 징역형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이는 1992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준 윤금이 사건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타운 여자들이 이끌어낸 판결이었다.
두세 평의 쪽방에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하고, 술과 약에 절어 힘겹게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서로의 삶을 보살피고 자립을 준비하고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키워간다. 김연자는 1988년, 마흔 여섯에 25년 동안의 클럽 생활을 정리한다. 그리고 기지촌의 동료들과 함께 천막 공동체와 쉼터를 만들며, 자신이 겪어온 상처와 분노의 깊이만큼 정열적으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었던 신앙을 징검다리 삼아 세상 밖으로 나와 신학 대학에 들어가고, 자신의 삶과 경험, 기지촌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한 김연자씨의 활동과 증언은 한국 역사 속에서 기지촌이라는 공간을 되살려내면서, 기지촌에 대한 무지·편견·오해 들을 바로잡고 풀어나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