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어느날, 광주 망월동 5.18 광주항쟁희생자 묘역.연합뉴스
그날 망월동의 하늘은 우중충하기만 했고, 검은 습기를 잔뜩 먹은 여름 하늘은 곧 비라도 뿌릴 것처럼 눅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내 기억 뇌리에 선명한 1993년의 어느 여름날의 망월동의 모습이다.
광주에 잠시 정착했던 동생집을 방문하고, 동생내외와 그리고 우리 식구들과 난생 처음으로 망월동의 묘지에 올랐다. 성역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여기저기 흙은 파헤쳐지고, 앙상한 느낌이 섬뜩하게 다가오던 망월동이었다.
사회주의가 무너졌고, 한 세기를 풍미했던 이념은 떠나버린 시기였다. 젊은 날의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많은 이들이 이념과 함께 역경을 견뎌낼 신념도 사라져 현실과의 어쩔 수 없는 타협의 길로 무리를 지어서 떠나던 시절이었다. 일찌감치 현장에서 떠나서 이국 땅으로 유학 길에 올랐던 나로선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었고, 그저 죄스러운 느낌과 안타까움으로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동현장을 지키던 동료, 후배들까지도 자기 갈 길을 찾아 사법고시나 회계사 시험의 대열에 자기 몸을 실었고, 사회변혁이라는 거대 담론이 더 이상 삶을 지켜주는 힘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저 안타까웠다.
처음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세상을 뒤바꾸겠다는 열정이 내겐 어디서 출발한 것이었는지 그 시작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 열정이 처음부터 과연 이념에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절박하게 물어보았다.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분노와 슬픔이 변혁을 향한 열정의 시작점이었다. 대부분의 내 또래가 그랬듯이. 그래서 80년 광주의 원혼들에게 호소하고 길을 묻고 싶었다. 그렇게 난 망월동을 오르고 있었다.
묘지에 올랐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윤상원 열사의 묘를 열심히 찾았다. 회색빛 하늘과 음산한 습기, 그리고 파헤쳐진 민둥산의 헐벗은 모습은 내게 암담함과 우울함을 더해 주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영정들과 그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죽어간 그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영웅이 아니었다. 사진의 모습들은 젊고 선하기만 한 보통의 이웃의 모습이었을 뿐. 가슴이 울컥하니 눈물이 앞섰다. 묘비 하나하나를 지나가면서 박관현 열사가 보였다. 이재호가 보였다. 조성만의 모습도 스쳐 갔다.
원통했다. 그래, 원통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만 잊혀져 갈 뿐, 세상은 이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잊고 흘러가고 돌아가고 있음이 원통했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깊은 절망으로 우리의 열정을 구원하였던 저들 앞에서 천박한 실망과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자들의 가벼움이 저주스러웠다. 이젠 모든 희망이란 다 떠나버린 것처럼 쉽게들 이야기하고 떠드는 세태가 가슴 아팠다. 죽어간 이들의 맑기만 한 모습들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