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월, 절망이 깊어 희망은 더욱 찬란했다

[나의 노래이야기②] 망월동, 1993년 여름

등록 2006.05.18 14:43수정 2006.05.1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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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1993년 여름 - 이성지 작사ㆍ작곡

동산 자락의 바람은 소나무 섶을 헤치고
바람으로 앙상함을 더해가는 한낮 불볕
절망을 노래하는 이의 부드러운 꿈을 본다.
그 속살 따스한 숨결까지도


동산 자락의 구름은 무겁고 짙은 회색 빛
산 아래의 빈 가슴이 뿜어대는 빈 꿈의 자욱
허나 깊은 절망은 가슴속 노래로 흐른다
여기 서러운 사랑은 다시 푸르른 강물로 흐른다

절망은 서러운 사랑을 사랑을 낳는다.
하여 여기서 절망과 사랑은 같은 푸른 빛
서러운 사랑은 다시 꿈으로 핀다.
하여 여기서 절망이 깊어 희망은 찬란하고 강하다.

이제 비로소 노래하리라
절망의 깊이로 스며오는 산 자와 죽은 자들의 꿈
이 꿈속에서 피어날 지지 않을 사랑노래


1992년 4월 어느날, 광주 망월동 5.18 광주항쟁희생자 묘역.
1992년 4월 어느날, 광주 망월동 5.18 광주항쟁희생자 묘역.연합뉴스
그날 망월동의 하늘은 우중충하기만 했고, 검은 습기를 잔뜩 먹은 여름 하늘은 곧 비라도 뿌릴 것처럼 눅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내 기억 뇌리에 선명한 1993년의 어느 여름날의 망월동의 모습이다.

광주에 잠시 정착했던 동생집을 방문하고, 동생내외와 그리고 우리 식구들과 난생 처음으로 망월동의 묘지에 올랐다. 성역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여기저기 흙은 파헤쳐지고, 앙상한 느낌이 섬뜩하게 다가오던 망월동이었다.


사회주의가 무너졌고, 한 세기를 풍미했던 이념은 떠나버린 시기였다. 젊은 날의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많은 이들이 이념과 함께 역경을 견뎌낼 신념도 사라져 현실과의 어쩔 수 없는 타협의 길로 무리를 지어서 떠나던 시절이었다. 일찌감치 현장에서 떠나서 이국 땅으로 유학 길에 올랐던 나로선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었고, 그저 죄스러운 느낌과 안타까움으로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동현장을 지키던 동료, 후배들까지도 자기 갈 길을 찾아 사법고시나 회계사 시험의 대열에 자기 몸을 실었고, 사회변혁이라는 거대 담론이 더 이상 삶을 지켜주는 힘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저 안타까웠다.


처음을 돌아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세상을 뒤바꾸겠다는 열정이 내겐 어디서 출발한 것이었는지 그 시작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 열정이 처음부터 과연 이념에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절박하게 물어보았다.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분노와 슬픔이 변혁을 향한 열정의 시작점이었다. 대부분의 내 또래가 그랬듯이. 그래서 80년 광주의 원혼들에게 호소하고 길을 묻고 싶었다. 그렇게 난 망월동을 오르고 있었다.

묘지에 올랐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윤상원 열사의 묘를 열심히 찾았다. 회색빛 하늘과 음산한 습기, 그리고 파헤쳐진 민둥산의 헐벗은 모습은 내게 암담함과 우울함을 더해 주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영정들과 그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죽어간 그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영웅이 아니었다. 사진의 모습들은 젊고 선하기만 한 보통의 이웃의 모습이었을 뿐. 가슴이 울컥하니 눈물이 앞섰다. 묘비 하나하나를 지나가면서 박관현 열사가 보였다. 이재호가 보였다. 조성만의 모습도 스쳐 갔다.

원통했다. 그래, 원통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만 잊혀져 갈 뿐, 세상은 이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잊고 흘러가고 돌아가고 있음이 원통했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깊은 절망으로 우리의 열정을 구원하였던 저들 앞에서 천박한 실망과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자들의 가벼움이 저주스러웠다. 이젠 모든 희망이란 다 떠나버린 것처럼 쉽게들 이야기하고 떠드는 세태가 가슴 아팠다. 죽어간 이들의 맑기만 한 모습들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왔다.

신묘역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묘비
신묘역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묘비이상동
그렇게 묘비들을 지나서 윤상원 열사의 앞에 드디어 이르렀다. 이젠 가슴 아픔과 원통함과 절망감이 가득 차올라선 눈물이 범벅이 되어 내리는 통곡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6살, 5살이었던 두 아이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엉엉 통곡하면서 눈물을 쏟아 부었다.

그날, 13년 전의 그날, 폭압적인 잔악한 공수 계엄군의 몽둥이에 총탄에 찢기고 아스라이 부서져간 그들이 원통했다. 물러서지 않으면서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섰던 그들에게 우리 모두가 부끄러웠다.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통곡으로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대신할 뿐.

1993년 여름의 망월동 동산에서 나는 5월의 영혼들에게서 내 삶과 내 신념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시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윤상원 열사
윤상원 열사
윤상원은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78년 광주로 내려와 양동신협에 다니던 이듬해 '들불야학' 1기 강학을 실시했다. 들불야학에 함께 했던 이들은 이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윤상원은 당시 김영철, 박용준, 김길만, 박용규, 서동주, 한태근 등과 함께 야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5·18항쟁이 일어나자 들불야학 강학들은 항쟁당시 유일하게 시민들에게 항쟁의 실상을 들려줬던 '투사회보'를 제작해 배포했다. 그러던 중 윤상원은 일부의 무기반납주장에 반대하면서 항쟁지도부를 규합, 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0년 5월 26일 마지막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서른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유가족 등은 망월묘역에 묻힌 그를 지난 1982년 박기순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치러줬으며 1997년 신묘역 조성으로 신묘역(국립5·18묘지)로 이장됐다. / 강성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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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츄어 작곡가입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격정의 시대를 지나면서 함께 공유했던 많은 노래들을 돌아보고, 그런 노래에 대한 소감이나 소회등을 짧은 에세이로 구성해 본다면 독자들과 잔잔한 정서의 공유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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