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잠시 귀국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이종현 전 <매일경제> 런던특파원은 서울 강의실이 아닌 제천 저널리즘스쿨까지 직접 찾아와 특강을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국내 최초로 설립된 저널리즘스쿨이 궁금했고, 오고가는 여정에서 한국의 산천을 눈에 담아가고 싶었다는 거였다. 박달재를 넘어 제천으로 오는 38번국도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서울보다 서늘한 제천지역의 산들은 지금이 벚꽃과 진달래로 뒤덮이는 때이다. 그는 매일경제 런던특파원을 마친 뒤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단계에 들어가 있다.
"한국 지식인들 장기적 안목 없이 신자유주의 지지"
이 전 특파원은 80년대 후반 이후 국가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권력 지형이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한 뒤 경제 매체에 새로운 선택이 요구됐다며 강의주제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80년대 후반 당시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면서 언론사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화를 선택적으로 지지하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규제완화에 대해 전면적인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의 후퇴로 수렴되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기업들의 요구가 맞물리면서 폭발적인 동력을 얻게 됐지요."
그는 이런 조류가 진보와 보수로 대별되는 상충된 것이었지만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공격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말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시장이 보수적 현상으로 선명하게 이해되지만, 당시는 심지어 상당수 진보쪽 인사들까지 민주화의 이름으로 이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기자를 포함한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장기적 안목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고 반성했다.
"70년대 초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에서 경제의 지구화 경향이 시작됐고, 80년대 중후반 동구권 몰락을 전후해서 신자유주의 시장은 세계경제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됐지요."
이 전 특파원은 "이런 현상이 경제매체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면서 " <파이낸셜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의 성장은 물론 국내 경제매체의 급성장도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언론사도 기업이라는 처지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은 성장의 기회였고 경제 매체가 규제 완화와 국가 후퇴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의 변화는 기회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위기도 동시에 도래했던 것이다.
"시장은 언론에게도 시장의 거래관계를 철저히 따르도록 강요하게 됐습니다. 광고는 수익의 원천이지만 정론에는 때로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사적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시장거래가 공적 공정성을 필요조건으로 하는 언론보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언론이 경제권력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매체의 정보기업화와 우려되는 논평의 약화현상
신자유주의 시장이 가져온 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은 경제매체의 정보기업화 현상이다. 이 전 특파원은 "로이터나 블룸버그처럼 언론매체의 외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상 정보업체로 기능하는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다"며 "한국의 경제 매체들도 이러한 기능을 강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보도와 논평으로 나눌 수 있다면 이런 현상은 분명 논평 기능의 약화로 나타날 것이다.
"논평의 약화 현상은 전략적 변화라기보다 신자유주의 시장 환경으로 인한 존재 의의 자체의 전환일 수도 있습니다. 넘치는 정보 속에 숨어 있다시피 논평기능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그에게는 좀 '불편한 진실'인 듯했다. 그는 "경제기자로서 어떠한 소양을 쌓는 것이 좋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그는 "전문성과 통찰력, 그리고 이해관계에 미혹되지 않는 엄정한 직업의식"을 기자의 기본 소양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철저한 사실 확인과 꼼꼼한 글쓰기를 강조했다.
"기본을 갖추지 못한 글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졌다면 그것을 펴기 위해 더욱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는 "현실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생각의 고리를 이어갈 때 사회를 보는 시각이 성숙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한 통찰을 사회에 전달하는 것이 기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소임"이라고 강조했다.
"통찰과 쉽게 쓰기는 기자가 잘 할 수 있는 영역"
주제 강의 이후 질문이 쏟아졌다.
- 한국에서는 진보언론이 위축되고 있는 반면 영국에서는 <가디언>이나 <인디펜던트>처럼 진보성향을 보이면서도 강한 경쟁력을 가진 신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겁니까?
"영국은 사상적 지형이 분명하게 구별돼 있는 반면 한국은 그러한 구분이 상대적으로 모호합니다. 이는 양국의 역사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지요. 영국은 2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과정에서 진보와 보수가 서로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도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구성이 진보신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거지요. 신문사 수익구조에서 광고의 비중이 한국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것도 큰 차이의 하나입니다. 신문 한 부당 가격이 비싸지만 진보를 주장하는 사회세력은 꾸준하게 진보 성향의 신문을 구독합니다."
- 우리 학생들이 기자가 될 때 건강한 시장질서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우선 기사를 잘 써야겠지요(웃음). 어떤 현실적 변화를 보면 그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관련된 책을 봐야 합니다. 전문성은 그러한 과정에서 길러지는 겁니다. 다양한 시각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토론 모임을 만드는 것도 좋겠지요. 토론하면서 자신의 논리적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고 자신이 설정하고 있는 방향이 정당한 것인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현실권력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제대로 감시해야 합니다."
- 우리나라 경제매체가 지금 시장화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며 규제 완화와 국가 후퇴를 강조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안연대 계열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재벌의 경영권 승계 등을 인정하고 사회복지 등에 기여하게 하자는 사회적 대타협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안연대의 제안 중에는 그럴듯한 것도 있지만, '사회적 대타협론' 같은 것은 현실에 대한 조회가 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힘의 균형이 현저하게 기울어있는 우리사회에서 재벌만 살 길이 열리는 거지요."
질의응답 시간 이후, 학생들은 교수들이 베푼 '자장면 파티'에서도 이종현 전 특파원 주변에 몰려들어 질문공세를 이어갔다. 그날(4월14일)은 마침 블랙데이였고, 1명을 뽑는 부산MBC 기자시험에 최종합격한 윤파란 학우를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권하는 동동주와 입에까지 넣어주는 보쌈안주에 얼큰히 취한 이종현 전 특파원은 서울행 막차가 떠나는 밤늦은 시간까지 한국언론의 고민과 해법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기자 되세요."
장장 4시간반 특강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언론의 새로운 표준과 가치를 모색해보려는 '저널리즘 특강'에 독자 여러분, 특히 언론인과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특강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은 사전에 연락해주시면(043-649-1148) 제한적이나마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특강일정표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홈페이지(http://journalism.semyung.ac.kr)에 게시돼 있습니다.
2008.04.19 15:50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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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언론에게도 거래관계 철저히 따를 것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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