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강수월래단 아침모임강강수월래단에서 아침마다 진행하는 모임시간. 몸풀기, 인사, 오늘의 한마디 등이 진행된다.
변형석
행사팀은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이벤트와 주말마다 있는 문화제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홍보기록팀은 매일 밤 열두시가 넘어서까지 일지를 정리하고 영상을 편집하고 일기를 쓰고 사진을 올리는 일을 한다.
조명도 없는 텐트에 모여 앉아, 트럭에 시동 걸어 전기 끌어다가, 오들오들 떨며 글을 쓰고 작업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안쓰럽기도 하고 훌륭하기도 한 것이 만감이 교차한다.
답사팀은 다음날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매일 점심시간, 다른 팀원들은 휴식하는 시간에 두세 시간씩 열심히 뛰어다닌다. 답사팀을 이끌고 있는 지원단장님은 이번 주 월요일부로, 앞으로 걷는 행렬과 관련된 모든 디렉팅은 답사팀의 청소년들이 직접 하자며 확실하게 책임을 넘겼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슬비가 결국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상편집을 노트북으로 한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부랴부랴 새로 노트북을 대여해가기까지 했는데, 15개에 이르는 테잎을 캡쳐해서 편집하는 일까지,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하지 말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그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낸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나는 솔직하게 묻고 싶다. 48일을 걸으며 야영하는 일 자체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그 가운데 자기 역할 맡아서 새벽까지 트럭 덜덜거리는 소리 들으며 텐트에서 작업하고는 새벽 6시에 다시 일어나 몇일 째 세수도 못하고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는 그런 일을 성인 중 몇이나 견딜 수 있을까? 몇이나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14세에서 19세의 청소년들 중 또또를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단언컨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자율성이 불충분한" 사람들이라면 대체 "정신적 신체적으로 자율성이 충분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여중고생들이 아직도 '어린애'로 보인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되려 광우병에 걸린지도 모를 소를 먹을거리로 공급하겠다는 생각, 그것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이 '어린애'같은 것이다.
합리적 판단 능력은 나이에 따라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건강하게 경험하며 성장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선거권을 그런 기준으로 줄 거라면 차라리 웃기는 어른들의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 적어도 십대는 자기 친구에게 죽을병에 걸릴지도 모를 고기를 선물하지 않을 정도의 합리성과 배려의 마음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건, 그리고 남자목욕탕 사건(훔쳐보기 미수?) 이후로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는데, 인물은 동일했고, 사건의 내용은 밤늦은 시간까지 시내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회의시간에도 안 오고 취침시간 직전이 되어서야 돌아온 사건이었다.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동일 인물들이 계속해서 반복하는 잦은 약속 위반들과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도 남자들이 벌인 사건이다. 내가 대안교육 현장에서 보는 바로,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의 '사건'의 중심에는 '남자'들이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일과 관계의 중심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자기주도학습을 가장 잘 하는 것도 여자들이었고,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아이들도 여자들이었다.
우석훈 박사는 이번 촛불시위를 보며, 우리가 고대하던 합리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첫 세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까지 하고 있는데, 그리 과한 표현이 아닌 것이, 지금의 여성 십대들은 소통, 배려, 리더십, 실행력, 자신감 등에서 한국 사회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여학생들에게 눌릴까봐 남녀공학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남학생의 학부모들이 생기겠는가.
강강수월래단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몇 명의 남자 단원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여자단원들에 의해서 운영이 진행되고 결정되고 있다. 이 세대에서는 적어도 남녀차별이 거꾸로 있었던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회의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여성들이 지적하고, 화내고, 비판하면 남성들이 방어하고, 무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사건도 여전히 뚜렷한 결론은 없었는데,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처벌'과 같은 형식에 대한 절대적인 반감이 작용했다.
청소년들은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처벌'이라는 형식은 별로 적절한 효과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고 신뢰해주는 것, 기다려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처벌 아닌 처벌은 15일 대구에서 있을 문화제에서 '아주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아주 열심히 했는지는 곧 내려가면 물어봐야할 것 같다.
이제 남은 보름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