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18 당시 태극기를 들고 민주화시위를 하고 있는 광주시민들.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민주화 대성회가 시작됐다. 오늘 집회가 몇 번째 열리는지는 모르지만 민주화를 부르짖는 집회가 또 열린 것이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운집한 시민들은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재남이와 나는 전일빌딩과 상무관 사이에 있는 경우회 건물(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민주의 종과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음) 담벼락에 기대어 열변을 토하는 연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목이 터질듯이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불렀다. ○○동 예비군 중대장, ○○국민학교 교사, 분노한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분수대에 설치된 임시연단에 올라 광주시민의 단결과 투쟁을 외쳤다.
시민들도 울분을 토하는 연사들의 외침에 힘찬 박수로 동참했다. 연사들의 힘찬 열변과는 반대로 분수대 중앙에 반기로 꽂아져 있는 대형 태극기는 광주의 슬픔을 대변하듯 축 늘어져 있었다.
수습대책위 간부 한 명이 연단에 올라서서, 현재 계엄군의 동향도 보고했다. 수습위원은 현재 군내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시국인식의 차이로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회가 끝날 때쯤 사회자가 현 광주상황을 종합하면서 덧붙였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오늘밤만 무사히 도청을 사수하면 우리들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밤만 넘기면 내일부터는 광주시내 각 동별로 예비군들이 동원됩니다. 시민군에 합류하실 분들은 남자는 광주YMCA, 여자는 광주YWCA로 집결해주십시오."집회가 끝나고 운집했던 시민들은 민주화를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대열의 맨 앞에서 수습대책위의 간부들과 광주지역 재야 지도급 인사, 교수 등이 정장차림으로 금남로를 걷기 시작했다.
각종 구호가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걷는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광주항쟁을 이끌고 있는 지도급 인사들 뒤로 전남대와 조선대 등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따르고 있었다. 뒤이어 시민들이 대열을 형성했다. 재남이와 나는 시민들과 함께 걸었다. 일련번호가 붙여진 일부 시민군 차들도 행진대열의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 보조를 맞추었다. 도로변에는 기동타격대라고 흰 스프레이로 쓴 군용지프, 미니버스, 트럭 등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행진대열의 선두가 금남로 5가 유동 3거리(현재는 4거리)를 지날 때는 금남로가 시민들로 가득 찼다. 도청 앞에서부터 금남로가 끝나는 유동 3거리까지 시민들로 대홍수를 이루었다.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가행진은 금남로-유동 3거리-양동시장 입구-돌고개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모든 상가는 철시한 상태였다. 행진대열의 선두가 돌고개를 넘어 농성동 로터리 부근 농촌진흥원(현 상록회관) 입구에 왔을 때,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계엄군이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엄군은 농성동 로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어느새 계엄군들은 쌍촌동 고개에서 이곳까지 1㎞ 정도를 더 시내 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길을 열어달라는 시민들의 함성에 한 군인이 핸드 마이크로 더 이상 행진을 하지 말고 해산하라고 경고했다. 바리케이드 좌우에 모래차두로 만든 임시 초소에서는 계엄군들이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시민들은 야유와 함께 "계엄군은 즉시 광주시 외곽으로 물러가라"고 촉구했다.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연좌시위를 했다. 대치상태가 30여 분 계속되다가 행진을 선도했던 몇 사람이 계엄군 측에 다녀왔다. 그들은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물러가도록 협상했으나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어쩔 수 없이 행진대열은 농성동 로터리에서 다시 도청으로 되돌아갔다. 시민들은 민주화 대성회가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귀가하지 않고 도청 앞 주변에 운집해 있었다.
시민군이 되다재남이와 나는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상무관에 갔다. 도청 맞은편에 위치한 상무관은 평시에는 경찰들과 유도선수들, 그리고 검도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이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기간동안 상무관은 예전의 심신을 단련하던 도장이 아니었다. 더 이상 우리 학교(서석고) 검도부의 연습장이 아니었다. 유도복을 입고 체력을 연마하던 상무관이 아니었다. 상무관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상무관 입구는 행진을 마치고 돌아온 시민들의 추모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평상시 기합소리가 가득했던 상무관은 슬픈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입구 쪽만 스탠드가 설치돼 있던 상무관은 추모 인파로 붐볐다.
아래편 마루에는 장내를 정리하는 수습대책위원들과 유족들이 있었다. 마루에는 가지런히 정돈된 목관이 수십여 개가 있었다. 관 위에는 어이없이 죽은 시민들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사진 옆에는 꽃이 한 송이씩 놓여있었다. 몇 개의 관에는 아직 구하지 못했는지 망자의 사진은 없고 꽃 한 송이만 덩그러니 놓여있기도 했다.
스탠드 건너편 벽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고, 실내는 향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관 위에 놓여있는 사진들을 둘러보니 기가 막혔다. 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여고생, 서당 훈장이 연상되는 긴 수염의 할아버지, 이마에 몇 가닥 주름살이 잡힌 초로의 아주머니, 검정색 교복에 교모를 쓴 남고생…. 이렇게도 무차별로 살상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곧이어 약식 추도식이 있다는 장내방송이 들렸다. 추모객들은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차마 다문 입이 떨어지지 않은 듯 모두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치밀어 오른 슬픔과 분노를 삭이며 겨우 노래를 마쳤다. 추도식 마지막 순서로 '고향의 봄'이란 노래를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애국가를 부를 때보다 더욱 처량했다. 여기저기에서 노래와 뒤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울고 말았다. 하얀 소복을 입은 유족들은 관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상무관은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분향을 끝낸 나는 분노와 슬픔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계속해서 많은 시민들이 분향을 하기 위해 상무관으로 들어갔다.
시민군 지휘부가 있는 도청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계속 광주시민들의 총궐기를 촉구하고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문득 분수대 광장에서 열렸던 민주화 대성회 때 한 연사의 말이 생각났다. '오늘밤만 도청을 지키면 시민군이 승리한다고 했지 않는가.' 조금 전 분향하고 나왔던 상무관의 처참했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도청을 사수하자. 아무 죄 없이 먼저 가신 시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마침내 나는 도청 사수를 다짐했다.
"재남아,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집에 가자."슬픈 표정을 하고 있던 재남에게 말했다.
"좋다! 오늘밤만 지키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다고 했지. 있다가 가자."재남이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재남이와 나는 곧바로 전일빌딩 건너편에 있는 광주YMCA로 갔다. 시간은 오후 6시쯤 됐다. 1층 강당에는 우리처럼 자원한 시민들이 200여 명쯤 있었다. (현재 광주 YMCA 1층에는 서점 등이 입주해있고, 2층에 강당이 있다.)
대부분 20대 청년들로 보였고, 나이 지긋한 중년 아저씨도 눈에 띄었다. 재남이와 나처럼 머리를 짧게 한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자원자들이 삼삼오오 강당마루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나타났다. 자원자들에게 모두 한 군데로 모이라고 했다. 그 청년은 175㎝ 정도의 키에 비교적 뚱뚱했고,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모이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부터 여러분을 지휘할 중대장 ○○○입니다. …."자칭 '시민군 중대장'은 도청사수를 자원한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현재 시민군과 계엄군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일들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의 말투로 봐서는 도청에 있는 수습대책위 간부로 보였다. 그는 우리 시민군 자원자들을 9명씩 분대를 편성해서 분대별 임무를 부여했다. 분대장도 선임했다. 분대편성은 임무 부여와 통제하기 좋게 편의상 만들었다. 그러나 소대 편성은 없었다. 분대장은 각 분대에서 연장자나 자원자를 임명했다.
중대장은 우리에게 주소와 성명을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는 주소와 성명이 기록된 종이를 보관하고 있어야 혹시 우리들이 죽었을 때 쉽게 신원 확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종이에 주소와 성명을 적어 분대별로 제출했다. 나는 나주의 파출소에서 조사받았을 때처럼 사실대로 적었다.
중대장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소총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몇 자루의 칼빈 소총을 가지고 와서 실탄장전과 사격방법 등을 가르쳤다. 나는 학교 교련시간 때 몇 번 총을 만져 본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총 다루는 법이 서툴렀다. 그래서 열심히 사격방법을 익혔다.
마침내 나는 최단기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어엿한 시민군이 되었다. 명찰도 계급장도 제복도 없이 그저 광주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한' 이름 없는 고교생 시민군이 된 것이다.
우리 시민군 자원자들은 소총 사격법을 배운 뒤, 광주YWCA(현재 광주YWCA는 유동으로 이전하고 그 터에 빌딩이 세워져 있음)에서 가져온 김밥과 주먹밥, 빵을 먹고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광주YWCA는 광주YMCA에서 바라볼 때, 금남로를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전일빌딩의 바로 뒤쪽에 있고, 거리는 직선으로 100m 정도 됐다. 당시 광주YWCA에는 여성들이 우리처럼 자원하여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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