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 대운하, 공교육 정상화 등 2008년 우리 사회의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각각의 논쟁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서로 반대 진영에게 던지는 논평은 날카롭고 비타협적이다. 수년 전 제도 정치에서 불어온 개혁의 바람 이후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웹2.0 세대의 양방향 토론 문화는 신선하면서도 거친 단면을 내보이며 매일 수천수만 건의 댓글을 생산하며 갈등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한국사회 논쟁의 역사에서 가히 전환기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한 철학자가 자신이 15년간 고민해오던 정치철학적 개념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왜, 김진석은 15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한국사회의 논쟁을 지켜보며 ‘기우뚱한 균형’을 이야기해왔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현재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유를 천천히 곱씹게 만든다.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걸어 들어간 철학자는 지금 어디에?
지금으로부터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독일 통일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몰락과 문민정부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정치구도가 급변하던 당시에 우리의 지식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파 지식인들은 “악의 승리를 만든 것은 선의 방관이었다”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다시금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좌파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하늘 위로 공중분해되려던 견고한 가치들”이 행여 공중분해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1989년 독일에서 돌아와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던 저자는 당시 사회를 바라보며 ‘기우뚱한 균형’의 화두를 고민하기 시작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우뚱한 균형’을 제목으로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다. 철학적으로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사회적 구체성을 확보하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중략) 과정으로서의 현실성을 드러내는 까칠까칠한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한 작업의 대표적 이름이 ‘우충좌돌’이다. 먼저 우측에 부딪치기. 이제까지 주류였었고 앞으로도 한동안 강하게 남아 있을 우파에 부딪치기. 그 다음엔 좌측에도 부딪치기. 흔히 쓰는 ‘좌충우돌’에 대한 정치적 패러디인 셈이다.”
즉, 우리 사회의 논쟁에서 해법을 찾기 위해 저자는 김훈과 홍세화 사이로, 김일병과 전두환 사이로,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사이로, 자율과 공공 사이로, 우석훈과 박노자 사이로, 보편주의와 실용주의 사이로, 위선과 위악 사이로,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로 우충좌돌하며 걷기 시작한다.
좌우간(左右間)을 걷는다는 말은, 철학자 김진석의 또 다른 중도 선언?
한국사회에서 좌파, 우파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것은 흔히 중도로 오해되곤 한다. 얼핏 중도좌파 기든스의 <제3의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중도에 가까운 정책들이 옹호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책은 단순히 ‘정치적 중도를 위한 사용서는 아니”라고 못박는다.
그는 이어서 “현 상황에서 인권이나 개인의 권리에 관한 정책이 문제가 될 때, 나는 좌파적이거나 자유주의적 정책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대체복무제의 도입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정책을 지지하는 글이나 주장이 완전무결한 평화를 전제하거나 목표로 삼을 때, 그래서 실재하는 모든 폭력을 엄격한 도덕주의의 관점에서 비난할 때,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며 그가 주장하는 ‘기우뚱한 균형’의 구체적인 상을 선보인다.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한편의 주장이 그야말로 말잔치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그는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그들의 주장이 얄밉기도 하고 뻔뻔해 보이기도 하다며 사사건건 그들과 ‘삐딱하게’ 부딪친다.
“그들 사이에서 부딪치며, 부딪치면서만, 겨우 균형은 기우뚱 잡히기 때문이다.”
우파와 좌파의 논리를 규명하는 철학자의 시선 한편에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사회비평들이 기다린다. 여기서 그의 시각은 솔직하고 적나라하며 유머러스하다.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한편으로 ‘우충좌돌 지식인’,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자’로서의 관점을 반영하며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를 보는 시선의 방식이 이처럼 다양하다는 것을 곱씹어 생각해보도록 돕는다.
여기서 그의 ‘기우뚱한 균형’은 실마리를 찾는다. 우리 사회의 논쟁이 끝없는 평행선을 달렸던 이유는 바로 우파와 좌파들이 낡은 패러다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임을 전제하며 그는 ‘소통의 부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한다.
촛불집회를 이해하는 겸손하고 뻔뻔하며 쫀쫀한 방식
2008년, 우리 사회의 ‘소통의 부재’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바로 ‘촛불집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로 시작된 이 집회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조정되었던 과정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 때로 돌아가, 이라크 파병, 천성산 고속철도공사와 지율스님, 새만금 간척사업, 황우석의 배아복제, 한미FTA 등을 거치며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들)가 이와 같은 갈등과 대치를 단지 관전하며 사건별로 희생양(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양산되어온 풍경을 즐기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날카롭게 지적한다.
현재 촛불집회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혹자는 제도정치로 돌아가 정당정치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일군의 지식인들은 일상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성급히 진단하기도 한다. 이 양편의 혼돈을 지켜보며 저자는 현재의 상황을 소통이 되지 않는 ‘지옥’이라고 단정짓는다.
“지옥에서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원한과 분노가 꼬이고 꼬인 것이 소통을 막는다. 그래도 나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지옥 같은 한국 상황에서 이해하고 껴안아야 할 점이 많다고 본다. 사람들이 괜히 할 일 없이 바닥에서 기는 건 아니다. 제국주의적 경향에 비판할 점이 있더라도, 세계화 과정에서 실력을 키워야 할 점도 있다고, 쫀쫀하게 혹은 구차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시민들은 비폭력을 지켰다. 대단하지 않은가?
박노자가 말하듯, 사람들이 그저 억눌린 채 대한민국이라는 ‘불안의 지옥’과 ‘갑갑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태도를 보라.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그들이 사랑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과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 불안과 공포를 떨쳐낼 수 있었다. 경찰과 대치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자신감과 자존심은 그들이 이제까지처럼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 자리에 참여해본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 현실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저자의 말대로 “겸손하게 이해하려고 해볼 수 있고, 뻔뻔하게 이해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쫀쫀하거나 구차하게 이해해야 할 때”도 있어서 정작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저자는 그 우스워 보이는 균형 잡기를 15년 전 쯤 철학적이고 시적인 뉘앙스의 ‘기우뚱한 균형’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매번 균형을 잡기 위해 외줄을 탈 때마다 그는“어느새, 균형 잡는 일은 뻔뻔하고 쫀쫀하고 구차한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임을 절감한다. 그래도 저자는 기우뚱한 균형이 자신과 시대를 사랑하는 감각의 징표라고 믿고 있다. 십수 년의 지긋지긋한 논쟁 속에서도 우파와 좌파 양편에 애정이 있다면, 좋지 아니한가.
덧붙이는 글 | 박대우 기자는 도서출판 개마고원 편집팀 소속입니다.
2008.07.29 10:43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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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뚱한 균형 - 동요하는 우파와 좌파에게 권하는 우충좌돌 정치철학
김진석 지음,
개마고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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