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냄비의 기업로고, 속 빤히 보여요"

[현장] 광화문 세종홀 앞에서 자선냄비를 하루종일 지켜보다

등록 2009.12.23 12:52수정 2009.12.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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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지나던 행인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성금을 넣고 있다.
길을 지나던 행인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성금을 넣고 있다. 김민지
길을 지나던 행인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성금을 넣고 있다. ⓒ 김민지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라고요~ 어려운 사람들이요."

 

9살 윤정이는 동전 몇 개를 냄비에 넣고 맑게 웃었다. 어린 아들에게 돈을 쥐어주고는 두세 걸음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키 작은 아이를 추어올려 돈을 넣게 하는 아버지들도 적지 않았다.

 

22일 정오부터 저녁 7시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앞에 설치된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모금에 동참하는지 지켜봤다. 성인어른 108명, 아이 181명으로 총 289명이었다.

 

구세군 자원봉사자인 대학생 윤지수씨는 "생각보다 돈 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며 "젊은층은 별로 없고 40, 50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내는 편이다, 아이에게 대신 돈을 넣게 하는 부모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윤씨는 "보통은 천 원이죠, 어른들은 5천 원, 만 원도 내더라고요, 십 원짜리 몇 개 넣는 사람도 봤고, 5만 원짜리를 넣는 사람도 한 번 봤어요"라고 덧붙였다.

 

구세군에 따르면 지난 12월 1일부터 21일까지 자선냄비 모금액은 23억 2천만 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4% 증가한 액수다. 맹렬한 추위에도 발길을 잠시 멈춰 지갑을 열고, 주머니를 뒤진 시민들이 모아준 돈이다.

 

군입대를 앞두고 기억에 남는 일을 하고 싶어 구세군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대학생 이진희씨는 "원래는 없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돈 내는 걸 보니까 봉사심 같은 게 저절로 생긴다"며 "훈훈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7살 아이에겐 너무나도 큰 구세군 자선냄비

   

세종문화회관 앞 구세군 자선냄비 자원봉사자들이 자선냄비 모금을 진행중이다.
세종문화회관 앞 구세군 자선냄비자원봉사자들이 자선냄비 모금을 진행중이다.김미영
▲ 세종문화회관 앞 구세군 자선냄비 자원봉사자들이 자선냄비 모금을 진행중이다. ⓒ 김미영

구세군 자선냄비는 구세군이 기획하고 기업이 후원하며 이씨 같은 자원봉사자들이 도와 시민들의 돈을 모은다. 종교단체와 기업, 뜻 있는 시민이 모여 자선을 실천하고 독려하는 셈이다.

 

그런데 하루 한 번씩 모인 돈을 수거한다는 냄비가 너무 크다. 광화문 일대에 설치된 5m 대형 자선냄비들의 홈은 7살 아이에게도 높아 돈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모르기도 하여, 아이 어머니를 당황케 했다. 그는 "경우는 다르지만, 구걸하는 사람들도 너무 큰 통을 들고 있으면 좀 그렇잖아요"라며 "보기에 좀 부담스러워요, 저게 다 찰까 궁금하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세군 측은 "후원기업에서 제작해 준 건데, 사실 좀 크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작은 냄비는 금방 차버려 자꾸 비워야 한다"고 답했다. 냄비가 큰 만큼 모금액도 커지면 좋은 일이지만, 외려 불편을 주고 부담감을 느낀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이 대형냄비에는 후원기업 로고가 새겨져 있다. 동아일보사 앞 냄비엔 '동아일보사, 스포츠동아', 현대해상 앞 냄비엔 '현대해상' 로고가 새겨져 있다. 후원사들은 자선을 베풀면서 광고도 하는 셈인데, 돈을 넣고 돌아선 송민희(32)씨는 기업로고를 보고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우리가 돈에 이름 써서 넣나요? 기업들도 표내지 말고 조용히 도우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기업에 돈 내는 것 같은 착각도 드네요." 

       

냄비뿐 아니다. 구세군 점퍼에도, 종에도 각기 다른 기업로고가 찍혀 있었다. 송씨는 "기업들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광화문 빛 축제에 묻혀버린 구세군 종소리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을 넣는 아이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을 넣는 아이김민지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을 넣는 아이 ⓒ 김민지

오후 6시께부터 광화문 광장에서는 빛의 축제가 시작됐다. 현란한 빛들이 번쩍이며 커다란 음악소리가 흘렀다. 구세군 종소리가 묻혔다. 대형 자선냄비에 머무는 사람들의 시선도 줄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철수를 준비하던 자원봉사자 이씨에게 한 시민이 "고생많다"며 인사를 건넸다. 취업준비생이라 밝힌 김종호(29)씨는 "돈이 많지는 않아 조금만 냈다"며 말을 이었다.

 

"돈을 내면 저도 기쁘죠, 뿌듯하고요. 그렇지만… 자선을 베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면 더 기쁠 것 같아요.(웃음)"

 

자선이 없어도 되는 세상이 오면 이씨는 다른 봉사활동을 하게 될 것이고, 시민들은 냄비에 돈을 넣는 '이색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업로고 박힌 큼직한 냄비도 없어질 것이다. 자선 없이도 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시민들은 추운 거리에서 자선을 베풀고 있었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얽힌 '재밌는 사실' 3가지

[재미있는 사실①] 자선냄비 모금참여율 4%

22일 하루 동안 광화문 광장 세종홀 앞의 자선냄비 모금 참여율은 4% 정도. 하루에 7000여 명이 자선냄비 앞을 지나쳤지만 모금을 하는 사람은 289명, 4%가 조금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재미있는 사실②] 참여자 2/3이 미성년자

참여자 중 2/3가 미성년자였다. 그 중에는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자선냄비를 보고 고사리손으로 동참하는 아이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스스로 동참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주로 초·중생들로 양쪽 주머니 속을 뒤져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지페를 넣거나 잔돈들을 쏟아 넣었다. 친구들끼리 여러 명 와서 앞다투어 모금을 하다 구세군 자원봉사자의 감사인사를 받고 쑥쓰러워 저만치 달려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세종홀 앞의 자선냄비는 얼지 않고 계속 데워질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③] 정장과 커피, 참여 거의 거의 안 해

추운 겨울날씨라서 그런지 길을 걷는 사람들 중 따뜻한 커피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자선냄비에 모금을 하는 사람 수는 한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구세군 자원봉사자 정아무개(29)씨는 "순수한 아이들의 참여비율이 높은 반면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이나 커피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모금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2009.12.23 12:52ⓒ 2009 OhmyNews
#구세군 자선냄비 #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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