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대성회
5.18 기념재단
이때만 하더라도 시위 분위기는 평화적이었다. 강경 진압으로 갈등이 불거진 여타 지역과는 달리 경찰 또한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찰과 지역 행정기관의 유연한 태도는 5월 18일 신군부측의 계엄령 확대 이후에도 광주만이 유일하게 시위를 지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지역에서 관철되었던 민과 관의 암묵적인 연합은 공수부대원들의 강경한 시위진압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을 때에도 노정되었다. 시민들을 두둔하고 나선 광주 전남지역의 기관장들이 신군부를 비판했던 것이다. 당시 전남도지사였던 장형태는 내·외신 기자 인터뷰에서 광주의 유혈사태를 "지나친 과잉 진압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라고 답변할 정도였다.
광주가 민주화항쟁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김대중이라는 상징적 존재 때문이다.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측의 김대중 구속 조치를 민주화에 대한 의식 부족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한 이래 70년대 전 기간에 걸쳐 감금과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특히 10·26 사태 이후에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그의 고향인 전남지역에서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하였다. 따라서 5월 18일에 전해진 '김대중 구속'이라는 소식은 그간의 민주화운동이 거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상계엄령의 확대'란 곧 유신체제로의 복귀라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광주'라는 도시의 성격도 중요하다. 광주는 호남지역의 교육 메카였다. 배후 농촌지역과 인근 중소도시에서 유입된 교육 인구가 광주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광주는 곧 '학생들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1980년 당시 광주 전체 인구의 1/7이 넘는 11만 명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을 정도이다. 이처럼 유달리 높은 학생 비율이 계엄령 확대 이후에도 유독 광주에서만이 학생시위가 지속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준 것이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지역의 독특한 인구 구성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전남지역 인구의 95.7%는 이 지역 출신자였다. 광주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전입 인구의 비율이 극히 적었던 것이다. 이는 지역주민의 공동체적 결속이 유달리 강화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신군부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에도 견결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광주/전남 지역 특유의 강렬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신군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정치적 부담감을 폭력에 의존하여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엄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도리어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국회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주요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강경 진압으로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표출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광주에는 서울과 같이 공수부대가 파견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