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안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여성. 육아가 여전히 여성의 몫인 우리 사회에서 허울뿐인 육아제도는 여성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박경현
서울 강남구의 한 개인병원에서 간호사로 8년째 근무 중인 이아무개(30)씨는 현재 임신 6개월이다. 오랫동안 근무한 만큼 이씨는 병원에서 임신 출산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지난 2월 병원을 나가면서 이씨에게 맡겨지는 업무는 오히려 늘었다.
강도 높은 수술실 업무는 물론, 새로 들어온 간호사를 교육하는 일도 그녀에게 맡겨졌다. 수술이 있는 날은 식사도 제 때 하기 힘들었다. 격무가 계속되면서 체력적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씨는 이달 초 "출산 2개월 전부터 출산휴가를 받고 싶다"고 의논했지만 원장은 "다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이씨 역시 병원 사정을 알기에 더 이상 얘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간호사가 넷뿐인데 이씨가 빠지면 그 업무가 고스란히 다른 간호사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특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 수술실에 들어가기란 무리이므로 나머지 간호사들의 부담이 더 커진다.
이씨가 병원에서 처음으로 임신한 경우라 병원 내 누구도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원장은 3개월의 출산휴가가 곧 육아휴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법정 출산휴가 기간과 휴가 급여까지 이씨가 일일이 알아보고 실장과 원장을 설득한 후에야 출산휴가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나마 출산 예정일 한 달 이내에 상황을 봐서 휴가에 들어가기로 했다. 실장은 육아휴직까진 아마 어려울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씨가 꼭 육아휴직을 해야겠다면 병원은 대체 인력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다른 간호사가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육아휴직이 끝난 후 자신이 병원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법대로' 썼다간 승진 불이익에 퇴직 압력 "법적으로는 다 보장이 되어있는 건데 왜 이렇게 출산휴가 하나 쓰기도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병원 사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에요. 3개월 출산휴가도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데, 육아휴직은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현재 우리나라의 산전후휴가는 90일이 보장되어 있고, 육아휴직도 만 6세 이하 자녀를 두었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각 1년씩 쓸 수 있다. 부모가 모두 일을 하고 있다면 한 아이를 기르는 데 총 2년의 육아휴가를 쓸 수 있는 셈이다. 사업주는 육아휴직자에게 매달 출산 전 임금의 40%(최저 50만 원에서 최대 100만 원까지)를 지급하도록 돼 있다. 대신 근로자가 30일 이상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 후 30일 이상 근무했을 경우, 고용보험에서 사업주에게 육아휴직 기간 중 매월 20만 원씩을 계산해 지원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와 현실은 간격이 크다. 육아휴직으로 인해 권고사직 등 인사 불이익을 받는 여성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ㅣ. 한국여성노동자회 '평등의 전화'가 지난 2010년 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접수한 상담 건을 분석한 결과 출산·육아휴직 관련 노동 상담이 940여 건으로 전체 상담 수의 30%를 차지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사무처장은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이 법상으로는 잘 정비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며 "휴직과 함께 승진이 불가능해지거나 해고당하는 피해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상담 사례를 들어보면 사측이 대체인력을 쓰는 대신 팀 인력을 감축하겠다고 주장해 여성 노동자가 육아휴직을 쓰기 어렵도록 부서의 분위기를 조장하거나, 간접적으로 퇴사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쓴 여성근로자에겐 인사고과에서 최하위 등급을 줘 승진이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