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검정제도, 이대로는 안 된다

[주장] 국민 통제 수단 전락 우려... 인정도서제·자유발행제도 고려해 볼만

등록 2012.08.20 11:43수정 2012.08.2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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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학교 국어 교과서 수록 문학 작품 저자의 현실 정치 참여 문제로 해당 작품 삭제 권고가 있었고, 교과서 검정 위탁 기관의 이런 '정치적' 행위에 대해 국민 여론의 질타가 이어져 결국 철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교육의 본질과 무관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교과서 검정 제도와 관련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정부 수립 이후 열 차례 넘게 교육과정이 개정되었는데, 그 시기는 대부분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 있다. 즉, 현실 정치권력 담당자들은 교육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통해 권력 유지 욕망을 구현하려 했고, 그것이 교육과정 개정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어 교과의 경우 국책 과목이라는 이유로 국정(또는 1종) 체제를 오래 고수하여 왔는데,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교과서로 공부해야 하는 제도 아래 국어 교과의 본질이나 성격과 무관한 제재가 수록되는 등 체제 유지용으로 악용되어 온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여 왔다. 

다행히 2007년에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라 2010년 중학교 1학년부터 검정 국어 교과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23종의 교과서 중에서 해당 학교 실정이나 여건에 맞는 교과서를 선택하여 국어 교육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현장에 많은 변화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연차적으로 2학년과 3학년으로 이어져 2012년에 이르러 검정 교과서가 중학교 전체에 적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는 2009년에 많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2년 만에 교육과정 개정을 강행하여 미처 적용되기도 전인 교과서를 놔둔 채 새로운 교과서 개발을 강요하였다. 작년 8월에 새로운 국어과 교육과정이 '졸속적으로' 고시되었고, 그 교육과정에 따른 새로운 교과서 개발을 독촉하여 올 3월 말에 검정 신청을 하도록 하였다. 불과 6개월 만에, 그것도 직전 교육과정 때의 학년별 연차 개발과 달리 3년 후에나 사용할 교과서까지 한꺼번에 다 만들라고 하여 3년 과정 6권의 교과서를 단기간에 만들어야 했다. 대개 한 팀당 교수와 현직 교사 20명 내외로 구성된 집필자들은 근무 시간 외의 휴일이나 야간에 만나 논쟁하고 토론하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을 보면 1차로 기초 조사를 하는 심사 단계가 있고, 2차로 검정위원이 모여 최종적으로 합격 여부를 가리는 심사를 하게 되어 있다. 집필 기준이나 검정 기준이라는 게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당락을 가름하는 심사는 검정위원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컨대 30여 개의 심사 항목 가운데 창의성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숫자로 점수를 부여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심사 결과에 이의가 있을 때 이의 신청을 하는 제도가 있으나, 그 심사를 동일한 검정위원이 하게 되어 있는 것 또한 항소심 재판을 1심 재판부가 담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괴이한 제도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검정 제도를 폐기하고 인정 도서로 바꾸거나 아예 자유발행제로 변경하는 게 필요하다. 검정 제도를 오래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점차 검정 기준이나 절차를 간소화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한다. 정권 담당자들의 교육을 통한 국민 통제 욕망을 포기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다음으로 검정 제도 유지 전제 아래 제도 자체에 대한 손질이 필요하다. 교육과정과 교과서 전문가들의 혼신의 노력과 출판사의 수억이 넘는 비용이 투입된 교과서가 몇 사람의 자의적 판단으로 무용지물이 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약간의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수정할 기회를 주어 시장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어차피 수준이 떨어지는 교과서는 현장의 외면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


국어 교과의 검정 교과서 도입은 국어 교육의 발전적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현행 검정 제도는 정권의 지나친 개입으로 인해 그 효과를 저감하고 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말로만 외칠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기 위해서는 권력자들의 기득권 포기가 필수적이다. 그 욕망을 놓지 않는 한, 정권 눈치 보기에 급급하여 객관적으로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검증된 문학 작품조차 삭제하라는 야만적 폭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발 국어 교육과 교과서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고 해당 전문가들에게 맡겨라. 이는 국어 교육의 정상화와 민족문화와 정체성의 미래를 위해 이 시대 권력자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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