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타이틀을 버리고 '목수'를 택했다

[시인의 목수일기①] 무엇이 나를 이 길로 이끄나

등록 2013.04.05 12:09수정 2013.04.0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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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3일, 벚꽃 핀 청도 한옥학교 일주문 모습.
4월 3일, 벚꽃 핀 청도 한옥학교 일주문 모습. 김동우

'우여곡절'이라고 하면 좋겠다. 교환교수로 일본에 다녀온 후 내가 겪은 2년 남짓한 시간은, 현재로선 그렇게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처음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일이기도 했으나 그것이 우리사회 전체의 어떤 '정의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그 일의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었다. 목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런 조절 능력이 가져다준 숙진 결과였다.


왜 하필 목수였을까? 한 마디로 대답하기는 힘들다. 목수 일기를 쓰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일기를 쓰면서 그 길고 구불구불한 내력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이 일기의 끝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어떤 대답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내게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에서 구체로, 개념에서 질료로, 머리에서 근육으로의 긴 여정이기도 하다.

목수는 못 되었으나 시인이 되어 버틸 수 있었다

사실, 목수는 나의 오래된 꿈이었다. 어디선가 그 사정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구체적인 모습이 얼른 그려지지 않지만 아마도 목수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자주 손을 다치면서도 사람들이 대목(大木)이라 부르는 이웃 친척을 따라가서는, 놀고 있는 연장을 꺼내 나무에 먹줄을 퉁기고 대패질을 하며 대나무못을 박았던 유년시절이 향긋한 송진 냄새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곳은 배를 만드는 마을의 바닷가이기도 했고, 집을 짓는 이웃동네 흙마당이기도 했다. "집 세 채를 지으면 인생을 안다"는 말도 초등학생이던 그 무렵에 들었다. 어린 내가 인생을 안다는 게 뭔지 알 까닭이 없었지만, 그것은 막연하게나마 바람이 왜 부는지, 어째서 구름은 끝없이 흘러가며 나팔꽃은 아침에만 피는지, 왜 우리가 기와집에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과 비슷한 무엇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의 집을 짓는 목수와 말(言)의 집(寺)을 짓는 시인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았고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믿었다. 목수가 되진 못했으나 시인이 되었으므로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찬란한 것 같지만 비루하고, 가열 찬 듯해도 한없이 지리멸렬한 이 덧없는 세속의 일상을 '그래도 나는 시인인데'라는 콩알만 한 자존심과 그 콩알만큼의 자유로움으로 견뎌내었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돈을 벌지도 못하고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그러나 시인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아무것이나 될 수 있는 역설이 있다. 콩알에 우주가 들었던 것이다.

이따금 나는 유체이탈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곤 했는데, 공중에 붕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북적대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도시며 멀리 뻗은 도로와 달리는 자동차들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우습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저것들이 다 무어란 말인가, 바람에 먼지처럼 스러질 저것들이. 진짜 보물은 따로 있고 잔치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뭐 이런 생각들로 아득해지곤 했다.

대기업 사원, 시인, 박사, 교수가 되었지만...

 청도 한옥학교 일주문. 이 학교 초대교수이자 명예교수였던 고 김창희 대목수의 작품.
청도 한옥학교 일주문. 이 학교 초대교수이자 명예교수였던 고 김창희 대목수의 작품.김동우

목수가 되는 일에 거창한 플래카드를 내걸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것은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특히 내가 경영해가는 내 삶의 방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내 손으로 내가 살 집을 짓고 내 손으로 내가 먹을 것을 키우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좀 더 욕심을 낸다면 돈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거기서 더 욕심을 낸다면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질경이풀이나 산토끼처럼 사람 아닌 것으로 살다 갔으면 좋겠다. 돈을 벗고 국가를 벗고 종래에는 사람을 벗는 일, 그것이 목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도 모르겠다. 찬찬히 더듬어보면 내가 진짜로 목수가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것 같다. 목수는 그저 어린 한때에 잠깐 맛본 '직업의 세계'이자 막연한 꿈이었을 뿐 구체적인 목표는 전혀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새마을 운동의 '잘살아 보세!'를 기치로 '조국 근대화의 과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뜨거운 계몽의 시절에, 반공 웅변대회에 나가던 평범한 시골의 한 어린이가 장래희망 난에 어찌 '목수'라고 당당히 적어넣을 수 있었겠는가!

목수는 결코 '새마을'적이거나 '근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반공'적이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크고 번쩍번쩍한 도시를 동경했다. 유리창으로 해가 뜨는 높은 건물과 수많은 자동차, 다양한 사람들의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자신의 꿈을 키우고 실현시켜가는 도시적 삶이야말로 조그만 시골의 어린이가 꿈꾸고 본받아야 할 당연한 길이자 사표였다.

마을 뒷산에 소를 먹이러 가서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건너편 저 멀리 검은 아스팔트 위에 마산·부산·서울로 가는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보였다. 그것은 비좁고 답답한 시골을 떠나 넓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었다. 자동차들은 아득히 멀어서 조그맣고 착한 장난감처럼 보였지만, 거기에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기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가득 실린 듯했다. 어린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꿈꾸던 그 길을 따라 서울로 가서 대기업 사원이 되었고 시인이 되었고 박사가 되었고 교수가 되었다. 도시인이 되어 아파트에 살면서 도시의 문화와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불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랬다. 그리고 다시 목수가 되기 위해 청도의 한옥학교에 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시인이 쓰는 목수일기>로 연재했던 것을 새롭게 다듬어 게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쓰는 목수일기 #한옥학교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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