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벚꽃 핀 청도 한옥학교 일주문 모습.
김동우
'우여곡절'이라고 하면 좋겠다. 교환교수로 일본에 다녀온 후 내가 겪은 2년 남짓한 시간은, 현재로선 그렇게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처음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일이기도 했으나 그것이 우리사회 전체의 어떤 '정의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그 일의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었다. 목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런 조절 능력이 가져다준 숙진 결과였다.
왜 하필 목수였을까? 한 마디로 대답하기는 힘들다. 목수 일기를 쓰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일기를 쓰면서 그 길고 구불구불한 내력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이 일기의 끝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어떤 대답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내게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에서 구체로, 개념에서 질료로, 머리에서 근육으로의 긴 여정이기도 하다.
목수는 못 되었으나 시인이 되어 버틸 수 있었다사실, 목수는 나의 오래된 꿈이었다. 어디선가 그 사정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구체적인 모습이 얼른 그려지지 않지만 아마도 목수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자주 손을 다치면서도 사람들이 대목(大木)이라 부르는 이웃 친척을 따라가서는, 놀고 있는 연장을 꺼내 나무에 먹줄을 퉁기고 대패질을 하며 대나무못을 박았던 유년시절이 향긋한 송진 냄새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곳은 배를 만드는 마을의 바닷가이기도 했고, 집을 짓는 이웃동네 흙마당이기도 했다. "집 세 채를 지으면 인생을 안다"는 말도 초등학생이던 그 무렵에 들었다. 어린 내가 인생을 안다는 게 뭔지 알 까닭이 없었지만, 그것은 막연하게나마 바람이 왜 부는지, 어째서 구름은 끝없이 흘러가며 나팔꽃은 아침에만 피는지, 왜 우리가 기와집에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과 비슷한 무엇이라고 여겼다."그러면서 나는 사람의 집을 짓는 목수와 말(言)의 집(寺)을 짓는 시인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았고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믿었다. 목수가 되진 못했으나 시인이 되었으므로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찬란한 것 같지만 비루하고, 가열 찬 듯해도 한없이 지리멸렬한 이 덧없는 세속의 일상을 '그래도 나는 시인인데'라는 콩알만 한 자존심과 그 콩알만큼의 자유로움으로 견뎌내었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돈을 벌지도 못하고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그러나 시인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아무것이나 될 수 있는 역설이 있다. 콩알에 우주가 들었던 것이다.
이따금 나는 유체이탈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곤 했는데, 공중에 붕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북적대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도시며 멀리 뻗은 도로와 달리는 자동차들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우습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저것들이 다 무어란 말인가, 바람에 먼지처럼 스러질 저것들이. 진짜 보물은 따로 있고 잔치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뭐 이런 생각들로 아득해지곤 했다.
대기업 사원, 시인, 박사, 교수가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