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정치는 민주적이지 않은가

[팟캐스트 윤여준 ⑨] 민주주의의 적은 민주주의 내부에 있다

등록 2013.12.14 09:39수정 2013.12.1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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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회 방송하는 <팟캐스트 윤여준> 중 '윤여준 칼럼' 전문을 <오마이뉴스>에 지상 중계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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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 앉은 수녀와 스님 광주지역 5대 종단(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불교, 개신교) 신앙인들이 지난 5일 오후 2시 광주 동구 YMCA에 모여 '박근혜 정권 퇴진촉구' 시국선언을 열었다. 5대 종단 신앙인들은 시국선언문을 통해 "박근혜 퇴진, 국정원 해체, 이명박 구속, 종북몰이·국민분열 중단, 종교적 양심에 대한 편파왜곡 사과, 총체적 불법선거 해결을 위한 특검실시"를 요구했다. ⓒ 소중한


한국 정치의 혼란이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여야 간 극한 대결로 국회는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올 정기국회만 하더라도 전체 회기 100일 중 60일 동안이나 문을 열지 못했고, 회기 마지막 날인 지난 10일에야 법안 34건을 비롯한 안건 37건을 부랴부랴 벼락치기로 통과시켰다.

취임 열 달이 채 안 된 시점에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박 대통령 퇴진 운동도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대의정치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 정치의 위기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위기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권위주의와 싸우던 민주화 투쟁시기에는 민주주의 관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원론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 정치의 민주화와 공산권 몰락을 계기로 자유민주주의는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 잡는 듯하였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가 급속도로 확산한 결과,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민주주의 관에 있어 국민적 분열이 초래되었다. 경제적 자유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는가 하면, 이에 대한 반발로 평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 민주주의 방패 삼아 이익추구 정치로 함몰

그리하여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여-야간이든 보수-진보간이든 양 진영 모두 특정 요소와 측면만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상정하고 이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이익추구 정치에 함몰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야 정당들은 국민들의 분열된 민주주의 관 즉 이념적 대결을 순화, 타협시키는 등 정치 본연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우선시하면서 이념적 갈등을 증폭 시킴으로써 정쟁만을 가열시켜왔다. 그러니 민생이 안중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다양한 가치와 요소들로 구성돼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와 연대, 나아가 정의와 같은 여러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치와 원리들은 상호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주는 것이다. 특히 평등과 자유라는 두 개의 가치는 가장 빈번하게 또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근래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극심한 이념 대결의 심층에는 바로 이러한 두 가치 간의 충돌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를 궁극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세력은 특히 신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경제적 자유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면서 이를 극대화하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나아가 신자유주의는 이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국가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경제적 논리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인간이 집단으로 행동할 때 자유는 권력이 된다"는 몽테스키외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긴 결과가 어떻게 됐는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로 공동체가 해체될 지경이고 중간층의 붕괴로 말미암아 민주정치의 건전한 계층적 기반이 약화되는 등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윤은 개인에게 돌아가고 위험은 사회와 국가가 떠맡는 일이 벌어짐에 따라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끊임없이 되풀이고 증폭됨으로써 대다수 무고한 국민들이 그 고통을 떠안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평등을 궁극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세력이 복지권과 정치참여 등을 위해 벌여온 노력은 타당하고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특히 선거를 의식하여,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의 평등 지상주의적 정책을 주장하거나 포퓰리즘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적지 않은 폐해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 마땅하다.

정의를 궁극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세력은 특정 집단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폭력 즉 공포정치도 가능하다는 정치적 메시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숱한 사람을 길로틴으로 처형했던 일이라든지, 인민해방이라는 거창한 목적은 어떤 수단도 정당화한다는 공산당의 공포정치 같은 역사적 체험들은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귀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우리 대한민국 내에서는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는 없었지만, 과거 반공과 경제건설을 국가적 목표 혹은 정의로 내세우고 이를 특정 지도자만이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결국 독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정의라는 가치를 들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 노력해 온 것은 평가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요소들과의 균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의 자체만을 궁극적인 가치로 밀고 나갈 때 오히려 국민적 공감대를 놓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헤아려야 한다.

민주정치는 상대방을 적이 아닌 선의의 경쟁자로 여기는 체제다. 또 민주정치는 특정 시점에서 어떠한 가치를 국가적 과제로 추진할지를, 결과가 불확실한 정치집단간의 경쟁에 맡겨두는 '끝이 열려 있는 체제'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치들은 상호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며, 따라서 특정한 하나의 가치를 궁극적으로 밀고 나갈 경우에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민주주의 내부의 역설'이 존재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여야, 원리주의적 태도 버려야

따라서 여야는 공히 원리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우리의 민주정치 체제가 지금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여야의 원리주의적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권은 반공 원리주의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물론 반공의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상대방을 마구잡이식 종북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민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주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할 뿐이다.

야권 역시 원리주의적 태도로 민주주의에 접근하는 습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민주 대 반민주'의 도식으로 양분하여 상대방이 가진 '비민주적' 요소를 빌미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반민주적'이라고 규정하는 공격성을 버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비민주적 요소는 정도와 성격의 차이는 있으나 양쪽에 다 있는 것이 아닌가?

민주정치의 요체는 국민의 정부선택권으로, 결국 충돌하는 가치 간의 경쟁을 보장하고 이를 관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선거 통해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는 절차적 원리란, 결과를 모르는 채 경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때때로 특정한 가치의 본질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확실히 보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에서 설사 자유, 평등, 정의 등 여러 가치 중에서 어떤 특정 가치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가치들의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특정 가치를 한 단계 강화하는 데 머물러야 하며, 이 역시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권 나아가 주권자로서의 국민의 올바른 민주 시민적 품성과 가치관이다. 민주 시민적 품성이란 절제, 존중, 배려, 자유, 포용 같은 가치들을 내면화한 태도를 말한다. 우리가 이런 민주 시민적 품성을 갖추어야 원리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럴 때 민주정치가 비로소 정상궤도에 올라가 국가발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우리 정치인과 국민 모두 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윤여준 기자는 전 환경부 장관이며, <팟캐스트 윤여준> 진행자입니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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