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호박들밭 여기저기에서 늙어가고 있다. 생긴것도, 색깔도 제멋대로.
이재관
그렇게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한 해를 보내고 농한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주변 회사 동료들은 농한기란 말에 웃음을 짓습니다만 저로서는 정말 농한기를 실감합니다. 소홀했던 책도 읽고 맛있는 것도 해 먹으며 주말을 보냅니다. 시골집에 가도 좋고 서울집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작년까지는 겨울에도 가족과 함께 의무적으로라도 시골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유연해진 것이죠. 서울이든 시골이든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주말을 보내면서 간식으로 먹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텃밭에서 나온 식재료로는 고구마, 땅콩, 감자, 호박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호박, 정확하게 말하면 늙은 호박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저 같이 어수룩한 주말농부에게 늙은 호박은 피할 수 없는 결과물입니다. 때를 맞춰 수확할 수 없는 것은 운명과도 같습니다. 한여름 호박이 익어가는 속도는 놀랍습니다. 이삼일 뒤에 따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애호박도 그 다음 날 보면 훌쩍 자라 있습니다. 그런 녀석들을 장장 5일 동안이나 못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 둘 거둘 시기를 놓친 녀석들이 어느새 농구공이나 럭비공만해져 풀 속에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마음을 먹고 풀을 베어 두둑을 덮는, 소위 멀칭이라는 것을 하다 보니 누렇게 변한 호박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21세기 초입, 다들 늙음을 두려워 합니다. 늙음은 경제력과 노동력 상실을 의미하고, 그런 늙은이는 곧 무용지물로 치부됩니다. 그리하여 늙어도 늙어 보이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머리에 염색도 하고 보톡스도 맞고요. 인간 세상과 달리 자연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당하죠. 저는 늙은 호박을 보며 당당함을 생각했습니다. 더 단단해 지고, 품위가 있고 말이죠. 거기다가 쓰임새도 젊은 애호박보다 더 다채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