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천만 목소리가 모이는 하나의 몸, 누굴까

[리뷰] 연극 <데모크라시>... 타협과 중재의 정치를 보다

등록 2014.03.10 16:07수정 2014.03.1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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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데모크라시>의 포스터. 주먹쥔 손의 장미꽃은 극중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의 게토 추념비 앞에 올리는 바로 그 장미꽃이다.
연극 <데모크라시>의 포스터. 주먹쥔 손의 장미꽃은 극중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의 게토 추념비 앞에 올리는 바로 그 장미꽃이다.몽씨어터
40년 만에 탄생한 사민당 출신 수상. 독일 통일의 첫 주춧돌을 놓은 수상. 다섯 개의 가명을 쓰며 나치에 저항했으나 나치가 남겨놓은 전쟁과 폭력의 채무를 자신이 무릎 꿇어 대신 갚은 남자.

수상으로 지낸 5년간의 긴 역사 그러나 결국 그의 임기 동안 이뤄지지 못한 정치범 석방과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본, 그가 아플 때 함께 아플 만큼 그를 사랑한 첩보원.


연극 <데모크라시>(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3월 6일부터 3월 23일까지)는 수더분한 아저씨를 가장한 능숙한 첩보원 '귄터 기욤'의 눈으로 그와 그의 내각을 보여준다. 그가 수상 관저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관객들은 그 관저 안에서 혹은 밖에서 일어난 수많은 정치적 계산과 요구와 타협을 지켜보게 된다.

끝없는 말과 끝없는 타협

열 명의 남자들이 일을 한다. 동독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쟁하고, 러시아 혹은 폴란드와 조약을 체결하고,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두고 화를 내고, 연정내각을 구성하고 상대 당 의원을 매수할 생각을 하고, 유세를 위한 여행을 하고 선거를 치른다.

그들이 하는 일은 대개 논쟁이나 성토, 여하간 수많은 불만과 반대가 '말'로 쏟아진다. 세 시간 내내 무대는 매우 소란스럽다가 극적으로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의 즉흥성은 통제돼야 한다" 등등.

헬무트 슈미트는 그가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에 대해 거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더 좋은 방법을 찾아봅시다"라고 대답할 뿐이다. 그는 듣고, 거부하지 않고, 침묵하며, 다만 손을 내민다. 그럼으로써 그는 러시아와 폴란드와 동독과 조약을 체결하고 그의 동방정책을 천천히 완성해나간다.


인터미션을 통과하면서 귄터 기욤의 일은 기밀문서를 빼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판에서 흔히 '심기보좌'라고 부르는 일로 바뀐다. 서독의 대동독 유화정책이 '미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독은 서독의 수상을 지키려 하고, 서독의 수상은 자기 내각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논쟁과 자신에 대한 요구에 지쳐하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된다.

빌리는 러시아와 폴란드와 동독과 사민당 내의 주요 당직자 및 내각 구성원들과 타협해나간다. 이를 위해 협상하고 지지를 구하고 연설하고 농담한다. 그는 심지어 이 말의 잔치를 더는 견딜 수 없는 자기 자신과도 타협하는 듯 보인다.


엠케는 '모두가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아무도 의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극 내내 빌리 브란트가 떠올리는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의 본명)은 불우했던 자기 어린 시절에 대한 연민이다.

그는 불행이 자신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내내 의식하는데, 그가 이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상대는 오직 기욤뿐이다. 금연을 선언한 빌리가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몰래 담배를 피울 때 곁에서 재떨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기욤이다.

'빌리 브란트'가 '민주주의'인 이유

'빌리 브란트' 역의 배우 김종태는 <엔터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작업이 "이 작품의 제목이 왜 민주주의인지 보여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에서 빌리 브란트는 우울증 환자로 의기소침했다가도 "연민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이라고 외치며 유세하고, 동독을 믿으면서 믿지 못하고,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내내 불우했던 자신을 의식한다. 그는 모순적이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며 빌리는 월트 휘트먼의 <나에 대한 찬사>를 인용한다. "내가 자기 모순적인가? 나는 거대하고,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을 두고 김종태는 "이 말이 6000만 개의 갈라진 목소리로서 '민주주의'를 상징할 수 있다"고 평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수만큼이나 갈라진 목소리이고, 그러므로 '민주주의 꽃' 선거를 통해 수상에 오른 빌리 브란트는 그 갈라진 목소리의 구현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대하고, 다수를 포함'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원래도 이름을 다섯 개나 가지고 있었던 그는 더욱 모순적인 인간이 된다.

그는 5년 내내 이 모순과 타협해나간다. 그 모순은 내각 구성원이나 사민당 당직자들의 목소리일 때도 있고 서독 국민들의 목소리일 때도 있으며 소련이나 폴란드일 때도 있고 동독일 때도 있다. 결국 그는 '더 많은 민주주의' '분열된 두 개의 자아를 하나로'라는 대명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과 타협한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자기 자신과도 타협한다. 그렇게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위한 첫돌이 놓인다.

결국 '빌리 브란트'는 모순과의 타협이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민주주의의 구현이며 이 작품의 제목이 '데모크라시'인 이유다. 기욤은 그런 빌리 브란트를 '첩보원'이라는 이질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프리즘인 셈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선 "통일은 대박"

빌리 브란트는 자주 침묵하고, 그럴 때 무대는 극적으로 조용해진다. 폴란드의 게토 추념비 앞에서 무대는 기욤의 독백을 제외하면 온통 정적에 휩싸이고 빌리는 매우 극적이고 섬세한 빛 속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가 일어난 후에도 장미 한 송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이다. 침묵과 논쟁의 극적인 교차다.

소극장으로서는 상당히 넓은 무대에 벽에 사진을 비추고, 조명이 다양한 방향에서 매우 섬세하게 활용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러닝타임도 매우 길고(170분) 대사는 더욱 많은 연극인 탓에 한두 번의 대사 씹힘은 애교로 넘어가줘야 할 듯싶다.

이 연극은 민주주의가 빌리 브란트라는 한 개인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면서, 그의 몸에서 모이는 모순, 결국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란 분열된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타협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가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동호대교를 지날 때, 버스 안 광고판에는 자랑스러운 캐치프레이즈처럼 "통일은 대박이다"와 우리 대통령의 얼굴이 여러 번 스쳐 지나간다.
#연극 #<데모크라시> #빌리 브란트 #독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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