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배달부' 최현우 씨가 쌈드림을 알리는 배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정수영
취업실패로 시작된 쌈드림
홍익대학교 화학공학과 시절, 그의 꿈은 리포터였다. 학원을 다니며 발성과 발음, 억양부터 스피치, 뉴스 리딩을 배우며 꿈을 키워 갔다. 그러나 리포터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자신의 개성적인 외모를 리포터의 세계에서는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깨끗하게 접고 입사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을 뽑아 주는 회사 한 곳 없으랴' 싶었건만, 지원한 100군데 회사 중 면접 보러 오라는 곳 없었다. 스물일곱 대학 졸업반 최현우 씨는 그의 표현대로 '처참했다.'
군고구마 장사, '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꿈붕어빵 장사를 해볼까 생각했다.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기계값이 비싸 이 또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나만의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자꾸만 커 갔다.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쌈드림이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응원해 주자.' 그의 새로운 꿈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쌈드림을 시작한 데에는 '취업용 스펙'을 쌓기 위한 마음도 있었어요. 내가 뭔가를 주도적으로 해서 어떤 실적을 낸 경험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거든요." 좌충우돌 첫 출발
'취업용 스펙'을 쌓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희망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었다면 쌈드림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쌈드림을 시작하기까지 최현우 씨가 겪은 맘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소를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구청, 경찰서, 소방서, 학교, 시청, 파출소 등 곳곳을 찾아다녔어요. 제안서를 109군데나 썼지요. 일일이 돌아다니며 인사드리고, 손 편지를 써서 쌈드림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말씀드렸어요. 그러나 모두 거절당했죠." 장소를 구하느라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청원경찰에 붙들려 쫓겨나기도 하고, 심지어 뺨을 맞은 경우도 있다는 최현우 씨. 그렇듯 우여곡절 끝에 2013년 5월 6일, 노량진 초등학교 앞에서 쌈드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쌈드림을 구상한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