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신이(사진 가운데)의 심폐소생술 덕분에 목숨을 구한 김미화 씨(사진 오른쪽)는 남편 김철수 씨(사진 왼쪽)와 함께 양산여고를 찾아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엄아현
"쿵~"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한 할머니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채 차가운 땅바닥에 쓰려진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할아버지가 부랴부랴 인공호흡을 했다. 소용없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와락 안고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하며 간절히 외쳤다. 30~40여 명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 때 한 여고생이 할머니에게로 다급히 다가갔다. 호흡과 맥박이 전혀 없었다. 더는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하고 심폐소생술에 들어갔다. 손깍지를 끼고 심장을 압박했다. 세 차례 더 심장압박을 했다. 할머니가 눈을 떴다. 호흡과 맥박도 돌아왔다. 온 몸을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학생은 외투를 벗어 덮어드렸다. 곧이어 119소방대원이 도착했다.
"잘못 되면 어쩌나... 두렵고 무서웠죠"지난해 10월 17일 오후 2시께 부산 연산동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토록 놀라운 용기로 소중한 생명을 살려낸 주인공은 바로 양산여자고등학교 3학년 윤혜신 학생이다.
"친구와 함께 현장체험학습 때문에 부산 지하철을 이용했던 날이었어요.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됐는데,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 간절해 보이셨어요. 도와달라 목이 메일 정도로 외치며 할머니를 끌어안으시는데, 우리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요. 그렇지만 심폐소생술은 중학교 수행평가 때 해본 게 다고, 고등학교 때 영상미디어교육을 받은 정도였기에 자신이 없었어요. 혹시나 나 때문에 잘못되시면 어쩌나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어요. 저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잘 기억은 안 나요. 도와드리지 않으면 할아버지까지 쓰러지시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나섰죠."혜신이 도움을 받은 할아버지 김철수(63)씨는 말했다.
"제 아내는 평소 지병이 없었어요.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변을 당한 거죠.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죠. 손, 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하얗게 질려버렸죠. 순간 TV에서 인공호흡을 했던 것이 생각나 시도했지만, 전혀 소용없었죠. 그 때 어떤 여성이 다가오더니 침착하고 능숙하게 심폐소생술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간호사인 줄 알았어요. 뒤늦게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 고마움요? 어떻게 말로 표현해요?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더니 선천성 협심증 진단이 나왔어요. 평생 모르고 살고 있었고, 다시 말해 언젠가 한 번은 쓰러질 병이었다는 거죠. 만약 집에서 그랬다면 손도 한 번 못 써보고 아내를 잃을 뻔했죠. 혜신이가 있었던 그 장소에 그 시간에 아내가 쓰러졌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거예요."
혜신이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김미화(63)씨는 말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어요. 당시 상황은 전혀 기억에 없죠. 남편한테 자초지종을 듣고 퇴원하는 날 혜신이한테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혜신이가 뭐라는 줄 아세요? 살아나 줘서 고맙대요. 마음이 너무 무거웠는데, 살아나서 직접 전화까지 해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아이가 어디 있어요? 내 손자보다 한 살 어린 학생이에요. 이렇게 바르고 착하게 아이를 키워 준 혜신이 부모님께도 감사한 마음이죠." 보건교사 추천으로 '하트세이버' 인증 혜신이 선행을 세상에 알린 건 양산여고 문정숙 보건교사였다. 혜신이는 희귀병을 앓고 있기에 문 교사가 정기적인 상담을 진행해 왔다. 상담 중 이 얘기를 들은 문 교사가 부산소방본부에 '하트세이버' 인증을 요청했고, 지난 1월 19일 여고생 하트세이버가 된 것이다.
하트세이버(Heart Saver)는 심폐소생술로 '심장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심장 정지로 죽음의 위험에 놓인 응급환자에게 신속하고 정확한 대처로 생명을 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인데, 주로 소방관들이 인증을 많이 받곤 한다.
문정숙 교사는 말했다.
"마땅히 칭찬받아야죠. 어떤 식이든 혜신이가 낸 용기를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혜신이는 중학교 1학년 때 뇌종양 수술을 했어요. 호르몬 분비를 담당하는 뇌하수체에 종양이 생긴 건데, 이로 인해 말단비대증까지 오게 됐어요. 흔히 거인병이라고 하죠. 성장호르몬 과다분비로 손, 발, 코, 턱 등이 커지는 거예요. 여학생으로서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병이죠. 평생 호르몬 주사를 맞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아버지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까지 어려워졌죠. 암덩어리와 함께 연달아 찾아온 불행은 어린 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죠. 하지만 혜신이를 보세요. 얼마나 밝고 착해요. 이런 아이가 누군가의 생명까지 구했다니…" 혜신이와 김철수·김미화 부부는 그 날 이후로 또 하나의 가족이 됐다. 사는 곳은 달라도 혜신이가 있는 곳이라면 한걸음에 달려가 함께 식사하고 응원하며 친손녀 못지않게 아끼고 있다. 졸업하고, 대학 입학하고, 시집가고, 아기 낳은 모습까지도 꼭 옆에서 지켜볼 거라는 이들 부부에게 혜신이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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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할머니 생명 구한 여고생... "선물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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