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달관 세대'가 사는 법> 기획기사 중 한 편
조선닷컴 누리집 갈무리
다시 '달관세대'로 돌아가 보자. 이 기사를 두고 "달관세대는 없다"는 단정부터,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야유까지 다양한 비판이 등장했다. 그리고 수많은 논쟁이 이루어졌다. 달관세대가 실제로 있기는 한지, 있다면 그 성격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혀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일보>가 하필 이 시점에, 달관세대를 '발견' 했다는 것이다. 나치 독일시절의 유대인 수용소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발견하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환경에서든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있다. 이게 무슨 대단한 비밀도 아니다. 그러니 삶이 팍팍한 한국사회의 젊은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따라서 새삼스러운 이 발견에 대한 마땅한 질문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발칙한 상상력을 보태 자문자답을 해보자. <조선일보>는 마치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같은 약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부의 행복을 '발견'해낸 것이 아니라, 행복을 느끼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자살·세대갈등·취업난·저출산¹삼포세대 같은 단어들이 음울하게 떠돌고 있다. 이 와중에 우리가 발견해내야 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약 빠는 사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인류문명은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발전 할 수 있었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시스템의 결함을 일부의 행복으로 감추는 행태는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이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 대한 폭력이자, 인류가 지닌 가능성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국가가 행복을 '발견해주는' 사회가 불행하다면, 국가가 행복을 '명령하는' 사회는 최악이다. 멋진 신세계가 디스토피아인 이유다.
이 뿐인가. "만족하라, 행복하라"는 명령은 심지어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기까지 하다. 현대의 자유자본주의 사회는 '욕망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는 인간'을 환영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심장은 자유로운 개인의 욕망 덕분에 박동한다. 이런 인간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 경제시스템에서나 사회가 개인의 욕망을 계획하고 통제한다. 어떤 개인이 '이제 그만 욕망하라'고 외친다면 그는 철학자거나 수도자겠지만, 국가가 같은 말을 외친다면 운영주체가 공산당이거나, 사회를 발전시킬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회에서나 자유롭고 건전한 개인의 욕망이 억압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다는 삼포세대가 화제가 된다. 더하여 주택과 인간관계도 포기했다는 오포세대도 등장한다. 심지어 꿈과 희망까지 포기하면 칠포세대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자살률과 출산율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경고등이 깜빡거린다. 사회구조적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데, 이들이 달관에 이르러 행복한지 아닌지가 중요할까. '소마'와 같은 '약'을 빨고, 달관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문제가 해결될까.
물론 <조선>이 독자에게 행복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사회의 위기를 드러내는 여러 가지 지표들이, 문젯거리가 못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선>은, 달관을 통해 청년들에게 애국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멋진 신세계>가 그러했듯, 시스템을 옹호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앞날에 대한 담대한 포부를 지니고 발전을 향해 노력하는 것과, 현재의 문제점을 외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던가.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기사와 이를 둘러싼 논란은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만든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원하는가. 아니, 우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살고 있나. 오래전 쓰인 소설이 주는 질문의 무게가,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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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약 빨고 쓴 기사... 그래서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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