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에 맞선 부산사람들

부산 평통사 6차 평화발자국

등록 2015.07.04 15:49수정 2015.07.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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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 강점에 맞선 부산사람들

일본은 한반도를 포기한 적이 없다. 식민지배를 사죄한 일도 없다. 미국의 대소봉쇄정책 덕분에 전쟁 책임과 배상에서 면죄부를 얻게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그에 규정된 한일협정 때문이다.


이 왜곡된 역사는 한반도 분단과 동북아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왜곡된 역사의 길을 따라 이제 집단자위권 행사를 결정하고 안보법제 개정을 통해 한반도 진출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있다. 군사대국의 길을 열어 동북아는 물론, 이제 세계로 진출하여 과거보다 더 큰 영광을 재현하려는 일본. 남요인후(南徼咽喉-남쪽은 조선의 목구멍)인 부산이 날카롭게 깨어 있어야 한다던 임진왜란의 피어린 교훈은 지금 어디에 남아있는 것일까?

부산 평통사 평화발자국은 지난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일제의 부산 강점을 돌아본 데 이어 지난 6월 27일(토), 강점에 맞선 부산사람들을 찾아나섰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참가자들이 평화발자국을 시작한 곳은 좌천동에 위치한 일신여학교 자리.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만세운동을 벌인다. 이들의 만세운동으로 20일 동안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졸업식 거부투쟁으로 이어지고, 경남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참가자들은 일신학교 여학생이라도 된듯, 당시처럼 꾸며진 교실에서 최광섭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은 후 전시물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쪽 벽에 붙여진, <증언>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일신여학교 당시 교실에서 평화발자국 참가자들이 부산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신여학교 옛날 교실 자리에서 최광섭 목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일신여학교 당시 교실에서평화발자국 참가자들이 부산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신여학교 옛날 교실 자리에서 최광섭 목사의 해설을 듣고 있다. 박석분

<증언>(부산진일신여학교 7회 졸업생 김반수)

"3월 1일에 독립만세를 전국에서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일신여학교 몇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혼수감 옥양목을 어머님 몰래 끄집어내어 기숙사로 가지고 가서... 기숙사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밤 열시가 넘어 창문에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이불을 가리고 옥양목에다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 물 검은 물로 칠하여 겨우 마련한 태극기... 거리로 가지고 나가...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부르다 부르다 지쳐 쓰러지면 또 용기를 내어 불렀답니다. 그 때는 여자로서 부끄럽다거나 무섭다기보다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지 하는 일념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항의를 했답니다."


"분단된 조국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일 수가 없다"

참가자들은 다음 코스인 정공단 바로 앞, 구멍가게로 이동했다. 구멍가게 앞에는 가게 주인인 정성연 선생과 최천택 선생의 아드님이신 최철 선생이 나와계셨다. 두 분 모두 첨예한 투쟁을 벌인 항일 투사의 유족들이다.

정성연 선생은 일제 말 학생 비밀 결사조직인 순국단의 폭약연구책이었던 정오연 의사의 동생분이다. 참가자들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최천택 선생의 생가자리로 이동하여 최철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천택 선생의 아드님이신 최철 선생 최철 선생이 아버님 최천택 선생의 생가 터 부근에서 옛날 일을 회고하고 있다.
최천택 선생의 아드님이신 최철 선생최철 선생이 아버님 최천택 선생의 생가 터 부근에서 옛날 일을 회고하고 있다. 박석분

1986년 부산에서 태어난 최천택 선생은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수차례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일을 반복했지만 그의 투지는 꺾일 줄 몰랐다. 그가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구금, 구속된 것은 54차례. 1920년 9월경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밝히자 함께 거사를 도모했다.

의열단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기도 한 그는 신간회(新幹會) 부산지회장을 역임한다. 광복 뒤에도 선생은 "분단된 조국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일 수가 없다"며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빨갱이'로 몰려 육군 특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소천 최천택 선생. 그는 모든 외세를 배격한, 부산이 자부할 만한 토박이 운동가다.

"분노의 대신동 아리랑"

참가자들은 봉고차를 타고 구덕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일제 당시 부산 공설운동장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역사적인 학생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동래중학교)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조선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고 학생들이 항의했지만 묵살되었다. 결국 폐회식에서 일본인 심판장이 일본인 학교를 우승학교로 발표하자, 조선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폐회식 운동장은 아수라장의 전쟁터가 되었다. 훈련을 지휘하던 육군대장 노다이와 경남지사, 경찰이 도망쳤고 학생들 1000여명이 '황성옛터' '아리랑' 등을 부르고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하고 외치며 행진했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 투쟁으로 일제의 엄중한 보도 관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학생 의거보다 더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항일학생 기념비를 돌아보는 참가자들 구덕운동장 정문에 항일투쟁을 벌인 학생들을 기념하는 비가 서있다.
항일학생 기념비를 돌아보는 참가자들구덕운동장 정문에 항일투쟁을 벌인 학생들을 기념하는 비가 서있다. 박석분

"겨레의 백대사표 백산 안희제"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대청동에 위치한 백산기념관 앞에 다다랐다. 안희제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인재양성을 결심하고 3개의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한계를 느끼고 191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만주 항일무장단체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할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만든 회사였다.

이후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을 들여 1919년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거듭난다. 당시 100만 원은 오늘날 4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포목과 건어물을 주로 판매하던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으로 전환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국제적 거점이 된다.

백산상회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백산상회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독립기념관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처이자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였다.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여 장래 독립운동에 활약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일본과 영국, 독일 등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통해 우리 민족 경제의 근대적 효시를 보여주었다. 왜 돈을 버는지, 왜 사업을 해야 하는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를 위해서 기업가가 어떤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한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참가자들은 이번 평화발자국의 마지막 일정인, 박재혁 의사에 의해 폭파당했던 부산경찰서 자리로 이동했다.

박재혁 의사 그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은 의열단 투쟁의 시작이었다.
박재혁 의사그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은 의열단 투쟁의 시작이었다. 박석분

1919년 대규모의 만세운동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에 대해 참혹한 억압으로 맞섰다. 평화적인 방법의 반일운동은 한계가 있다는 데 공감한 독립인사들이 혁명적인 활동에 공감하게 된다. 이에 의열단 등이 나서 일본경찰에 대한 폭력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의열단 투쟁의 시작이 바로 박재혁 열사다. 초량 출신인 박재혁 의사는 동창생인 최천택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의열단원이 되어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그는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않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한 뒤 단식과 함구로 9일이 지난 후 순국하였다. 중상을 입은 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도 사망하였다.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의열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표적을 특정해 놓고 정확히 그런 목표를 매번마다 바꿔 가면서 공격을 했지, 무차별로 살상하지는 않았거든요.... 불특정 다수를 살상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런 시도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해서 공포심을 크게 일으켜서 정치적 효과를 달성하겠다는 테러와는 의열단의 활동을 상당히 다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하려 했던 부산의 항일 투사들의 족적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의 힘겨루기가 치열해지고 있는 지금의 정세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번 평화발자국은 자주적인 태도를 갖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나가지 않으면 큰 위협에 직면해 일제강점의 악몽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일정이었다.

"광복로에서 평화와 통일의 노래를 부르다"

참가자들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상기된 표정으로 광복로 시티스팟으로 이동했다. 주말 오후, 정말 많은 시민들이 오가는 장소다.

홍슬민 양과 방영식 목사의 노래공연은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자주독립의 과제는 오늘 평화통일의 과제로 이어진다. 노래처럼 평화통일의 기운이 부산에 넘쳐나기를 소망해본다.

광복로에서 부른 통일노래 이 날 홍슬민 양과 방영식 목사가 평화와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광복로에서 부른 통일노래이 날 홍슬민 양과 방영식 목사가 평화와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박석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광섭 해설사(부산 평통사 대표)가 만든 해설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부산평통사 #평화발자국 #일제 #항일투쟁 #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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