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택 선생의 아드님이신 최철 선생최철 선생이 아버님 최천택 선생의 생가 터 부근에서 옛날 일을 회고하고 있다.
박석분
1986년 부산에서 태어난 최천택 선생은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수차례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일을 반복했지만 그의 투지는 꺾일 줄 몰랐다. 그가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구금, 구속된 것은 54차례. 1920년 9월경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밝히자 함께 거사를 도모했다.
의열단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기도 한 그는 신간회(新幹會) 부산지회장을 역임한다. 광복 뒤에도 선생은 "분단된 조국의 해방은 진정한 해방일 수가 없다"며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빨갱이'로 몰려 육군 특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소천 최천택 선생. 그는 모든 외세를 배격한, 부산이 자부할 만한 토박이 운동가다.
"분노의 대신동 아리랑"참가자들은 봉고차를 타고 구덕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일제 당시 부산 공설운동장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역사적인 학생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동래중학교)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조선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고 학생들이 항의했지만 묵살되었다. 결국 폐회식에서 일본인 심판장이 일본인 학교를 우승학교로 발표하자, 조선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폐회식 운동장은 아수라장의 전쟁터가 되었다. 훈련을 지휘하던 육군대장 노다이와 경남지사, 경찰이 도망쳤고 학생들 1000여명이 '황성옛터' '아리랑' 등을 부르고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하고 외치며 행진했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 투쟁으로 일제의 엄중한 보도 관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학생 의거보다 더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