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의 증명이예다씨의 여권을 살펴보고 계신 다카하시 다케토모 선생
안악희
다카하시씨는 이예다씨에게 덕담을 건넸다. 이어서 그의 베헤이렌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북폭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태평양 전쟁을 겪은 세대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민간인을 폭격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베헤이렌은 미국의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베트남전 초기의 전략 폭격작전. 1965년에 시작하여 1968년에 끝났다. 필자 주)에 자극을 받은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결성한 단체다. 당시 일본에는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오롯이 가진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군국주의적 집합체로 보는 선입견이 존재하는데, 일본은 패전 이전부터 전쟁에 비판적인(또한 전시 체제 하에서 숨죽이며 암약하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전후 진보와 리버럴 세력으로 결집하였고, 사회 개혁을 위해 좌충우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가 베헤이렌을 결성하게 되었다.
"베헤이렌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일본이 전쟁의 전진기지로 쓰이는 것에 반대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죠. 가입도 탈퇴도 자유였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도록 의견을 개진했습니다."여담으로 다카하시씨는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그 시절에는 '평범하게' 받아들여 지던 군국주의 사상에 경도된 소년이었다. 공습을 경험했고, 민간인 소개로 인해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친척집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적들이 쳐들어 오면 죽창을 들고 싸울것이라고 다짐했던 소년은, 패전 후 등교한 학교에서 교과서에 온통 먹칠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교과서의 군국주의적인 부분이나 군사주의를 미화하는 부분은 미군정에 의해 전부 먹칠을 하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다카하시씨는 도쿄대 대학원 졸업 후, 1965년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소용돌이 치던 시기였다. 이 때 다카하시씨는 막 결성된 베헤이렌에 참가했고, 베헤이렌 유럽 담당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유럽에서 연대활동에 나서게 된다(여담으로 이 당시 다카하시씨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와 조우하게 되고, 이 두 석학의 일본 강연을 성사시키는 데에 협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귀국 후 릿쿄대에서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전임 활동가로 나서게 된다.
베헤이렌은 당시 철학자 츠루미 슌스케(2015년 작고)와 정치학자 다카바다케 미츠토시에 의해 1965년 결성된 조직이었다. 베헤이렌은 보다 넓은 저변확대와 실효적인 운동을 위해 "대중적 인지도가 있으면서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을 리더로 필요로 하다가, 인기 작가 오다 마코토를 찾게 되었다. 오다 마코토는 1960년부터 평화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그렇게 리더가 되었다. 베헤이렌은 폭넓은 대중운동을 통해 "전쟁을 하지 않는 일본"의 의식을 일깨우는 운동을 했다.
우리는 반전 평화운동으로 격동기를 형성한 단체와 인물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쌓여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다카하시씨에게 물어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에서는 징병에 반대하여 감옥에 가거나 망명하는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베트남에 가고 싶지 않다고 탈영하는 미군을 비난하는 일본인들은 없었습니까?""없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이 하던 짓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시 미군 병사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다카하시씨는 말을 이어 가셨다.
"군인은 (지휘부를 제외하고)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의 리더인 오다 마코토는 전쟁의 참화에서 죽어가면 그것은 '난사(難死)'라는 개념을 들어, 군인이 전장에서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원하지 않는 명령을 수행하는 피해자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탈주 미군들을 도왔을 때, 일본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신고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한편으로는 그도 우리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신듯 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의 상황 하에서,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베헤이렌이 결성되기 전에, 한국군은 이미 파병을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사회 일각에서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문제 제기를 했지만, 한국군은 미국이 요청하기 전에 스스로 파병했습니다. 저로서는 당시의 한국 분위기를 잘 모르겠습니다."나는 이 복잡한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사실, 한국은 당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에 강하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전쟁은 다양한 이유가 있었고, 여러가지 이해에 따라 같은 한국인들끼리 죽고 죽인 전쟁이지만, 남한에서는 '북한 공산도배의 침략으로 인한 전란'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조선의 전면 남침으로 벌어진 전면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억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기 위한 반공성전이라는 인식, 한국전쟁 당시 UN 연합군에 의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통킹만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전이 개전한 후, 이 흐름은 당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당시 탈영병들의 이야기 베헤이렌의 미군 탈영병 지원은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활동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미 항모 인트레피드호에서 탈영한 "인트레피드의 4인"이다.
다카하시씨의 말에 따르면, 인트레피드호가 일본에 정박했을 당시, 베트남전에 반대한 미군 4명이 탈영을 감행했다. 이들이 도쿄 시내를 떠돌고 있을때, 우연히 신주쿠에서 이들을 만난 젊은이들이 "베헤이렌이라는 단체에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했다. 이들은 그 길로 베헤이렌을 찾았고, 베헤이렌은 이들을 몰래 홋카이도로 보내서 소련 연락선을 통해 밀항시켰다. 이들은 소련을 통해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이에 고무받은 베헤이렌은 미군 탈영병들을 망명시키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베헤이렌의 내부의 비밀조직인 자테크가 결성되었다. 자테크는 망명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소그룹이었다.
베헤이렌은 인트레피드의 4인이 탈영을 할 시점 이전부터 미군부대 앞에서 베트남전에 참여하지 말것을, 병역을 거부할 것을 독려하는 전단을 나눠주는 등, 반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반응한 미군들이 적지 않았다. 인트레피드의 4인 이후, 다양한 미군 탈영병들이 베헤이렌을 찾았다. 이들 중에는 한국계 미국인 병사 김진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 김진수는 미군 신분이었지만 한국 국적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 양국의 외교문제로 비화 할 수 있었고, 중앙정보부, 일본 공안 당국, 미군 헌병대가 함께 찾아 나서는 기묘한 풍경도 펼쳐졌다(김진수에 관한 이야기는 <한겨레 21> 1010호와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카하시씨가 질문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를 반대하면 어떻게 됩니까?"이예다씨가 답했다.
"대부분 1년 6개월의 징역을 받고 감옥에 갑니다.""대체복무나 다른 방법은 없나요?"옆에서 내가 거들었다. "대체복무는 2007년에 도입될 뻔 했는데, 정권이 교체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나는 말을 이어갔다.
"현재 한국에서는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매해 600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이유부터 정치적 신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이유로 병역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해외로 떠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망명을 결행한 사람들이 이예다씨 외에도 더 있습니다. 한국인 망명자들에게는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다카하시씨는 당시 자테크와 자신이 망명을 도왔던 미군 병사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 했다. 다카하시씨는 당시 미군 병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일본은 베트남전을 수행하기 위한 미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베트남 공습을 위한 전투기가 오키나와에서 출격하고 있었고, 수송선에 실려온 미군 병사들은 일본에 잠시 머물다 떠났습니다. 이 와중에 탈영한 병사들이 우리를 찾아왔고, 우리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초기에는 네트워크를 최대한 동원해서 이들을 보호할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연이 닿는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지인의 집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홋카이도의 밀항선으로 탈영병들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먼 길을 가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공안 경찰이나 미군 헌병에게 걸리지 않고 안전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산 속에 움막을 짓고 탈영병을 재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전국적인 연락망을 통해 조력자들을 모았고, 미군 탈영병들을 더 안전하게 망명시킬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당시 미군 탈영병을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공간을 제공한 사람 중에 번역가 사카모토 가즈키도 있었다고 한다. 사카모토 가즈키의 아들이 바로 현대음악의 거장인 사카모토 류이치다. 베헤이렌 관련 서적을 보면 그가 10대 시절 미군 탈영병과 조우한 적이 있다는 내용도 언급된다. 자뭇 흥미로웠다. 역사의 톱니바퀴는 의외의 순간에 맞물리는 법이다.
"처음에는 홋카이도에서 밀항선에 승선시킨 뒤, 소련을 통해 스웨덴으로 보내는 루트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루트가 탄로난 뒤(CIA 소속인지 미군 정보부 소속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탈영병을 가장한 정보 요원이 자테크에 접근하여 탈영 루트를 알아냈고, 망명 직전에 잠적했다. 이 이후 망명 루트가 탄로났고, 비슷한 시기에 소련과의 견해 차이로 더이상 소련 밀항 루트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 주) 우리는 다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선박을 이용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습니다."다카하시씨는 이 이후 자테크의 노선이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기본적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의하면, 미군 혹은 미군속 요원이 일본 영토를 드나드는 데에는 출입국 관리소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이는 미군 요원들의 일본 출입국을 간소화하기 위한 조항이었는데, 자테크는 이를 기발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홋카이도 루트가 막힌 뒤, 자테크는 대담하게 여권을 위조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아예 초법적인 방법으로, '여권을 위조해서 일단 외국으로 보내면 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여권 위조 기술을 배워 왔습니다. 처음에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도피시키던 사람들에게 여권 위조를 배웠는데, 너무 낡은 방식이라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마치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다단계 접선을 통하여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거물에게 여권 위조를 배워왔습니다. 결국 이들은 위조 여권으로 파리에 도착 후, 스웨덴으로 가서 망명에 성공 할 수 있었습니다."자테크는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미군들을 해외로 도피시켰다. 다카하시씨는 자테크 회의 중에 직접 손을 들고 '내가 직접 유럽에 가서 방법을 찾아 보겠다, 또한 유럽에서 협력해 줄 수 있는 단체를 찾아 교섭해 보겠다'고 했고, 시민들에게서 모금을 통해 모인 자금을 들고 유럽으로 향했다. 여권 위조 기술을 통한 미군 탈주병 망명 이야기는 공소시효가 지난 2000년 이후에 비로소 공개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21> 1022호
"고경태의 1968년 그날 - 파리 뒷골목에서 여권위조를 배우다" 에 자세히 나와있다 )
이 때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다카하시씨는 여권 위조 기술자에게서 "여권 위조를 위해서는 여권 원본이 필요하다"는 점을 당부받았다. 그래서 다카하시씨는 유럽을 돌면서 여권을 모았는데, 밀라노의 시민단체 회원들은 기차에서 1등석 승객들의 여권을 훔쳐서 가져다 주기도 했고, 스웨덴의 진보적인 출판사 직원들은 "어차피 우리는 그냥 분실신고 하고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며 자신들이 가진 여권을 모아서 주기도 했다. 미군 탈주병을 위한 도움의 손길은 국제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탈영병들을 망명 시키는 한편, 일본 국내에서도 탈영 미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또한 "탈영병 통신", "자테크 통신"같은 팜플렛을 만들어 선전활동을 하는가 하면, 주일미군 기지 주변에서 "반전 GI 운동 지원" 활동을 했다. 망명 뿐만 아니라 군대 내부에서 병역거부 또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60~70년대의 일본은 좌우 양쪽에서 미국의 전쟁기지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존재했다. 한국에는 일본에 군국주의가 남아있고, 일본은 전쟁과 군대에 대해 별 이의가 없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전후 일본은 염전사상(전쟁에 관해 염증을 느끼는 사상)과 반전주의가 강했다. 형제나 이웃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경험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고, 개인이 전쟁의 도구로 쓰여서 소비되었다는 개념도 강하게 있었다(여담으로 다카하시씨는 "일본 전몰학생 기념회"를 통해 반전운동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태평양 전쟁 후 학도병 전사자를 추모하는 반전주의 단체였다. 이는 "와다츠미노 카에 기념관"으로 이어졌으며, 다카하시씨가 현재 이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 주). 물론,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패전의 책임을 다른곳으로 돌리고 전쟁에서 졌을 뿐 일본의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공습과 원자탄 폭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전쟁의 무의미함은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전후 세대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구세대의 군국주의는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가해자가 되었고, 또한 개인은 그 틈바구니에서 무의미한 피해자가 되었다. 개인이 가해자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만세일계의 천황 군대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는 일본이 전쟁을 해서도, 개인이 전쟁의 참화를 겪어서도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점은 좀 부러웠다. 어차피 전쟁을 하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국가는 전쟁과 영광을 거창한 말로 포장하여 국민들을 전선으로 내몰지만, 그 뒤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는 높으신 분들이 계시고, 병사들을 먹고 입히고 싸우게 하는데 드는 쌀과 옷과 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두둑하게 한 몫 챙기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쟁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전쟁의 숭고함이 더이상 개인에게 발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카하시씨는 당시 일본의 정세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어떠한 배경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베트남의 문제가 어떻게 일본 사회에 파고들었고, 당시 베헤이렌과 자테크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헤이렌은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미츠비시 중공업의 주식을 사서 소액주주로서 총회에 참석하기도 했고(이 주주총회는 난투극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총회꾼들과 반대자들이 베헤이렌 멤버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배우 제인 폰다는 "베헤이렌"이 쓰인 헬멧을 쓰고 미군 부대를 돌면서 병사 개개인이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재까지 이어져서, 일본의 군사국가화를 반대하고 전쟁법안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문제는 설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