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쌍x" 외친 어르신에게 대학생이 한마디... 희망을 보았다

전주 관통로 사거리, 전북도민 총궐기 대회 스케치

등록 2016.11.20 19:27수정 2016.11.22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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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도민 총궐기 대회
전북도민 총궐기 대회박호연

오후 3시부터 전주 시내 곳곳에서는 사전 대회가 있었다. 내가 있었던 전주 오거리의 시민대회는 4시 반쯤이 되자 총궐기 대회가 있을 집결지, 전주 관통로 방향으로 행진했다. '박근혜 퇴진, 재벌도 공범'을 외치며 걷는 행열 맨 뒤에는 구호 깃발로 치장한 농민회 트랙터가 따라왔다. 전남 해남에서 행진을 시작한 농민회 트랙터는 서울을 향하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은 전주를 지나고 있었다.


집결지에 도착하자 중앙 무대가 앞으로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행진 열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농민회 트랙터가 자리를 잡자 궐기대회의 일정이 시작됐다. 수많은 시민들은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얇은 은박 스티로폼을 깔고 거리에 앉았다. 가족 단위의 시민들이 많았다. 중고생과 같이 온 부모들도 많았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유모차를 밀고 나간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촛불이 하나둘 켜졌다. 시민들의 자유 발언이 시작됐다. 어제 전주의 총궐기 대회에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발언이 주를 이뤘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등 아직은 어린 친구들이 어찌나 웅변을 잘하던지 집회에 오랜만에 나온 새삼 바뀐 집회 분위기와 학생들의 자발적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주 외고 1학년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시종일관 논리적인 구성으로 발언했는데,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냐며 화를 토해내는 부분에서는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속이 들어찬 아이들이 비판적인 시선으로 어른들의 사회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될 미래는 지금보다는 희망적일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또 다른 학생의 발언 중 정유라의 비판하며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를 몰아내자는 내용이 있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정유라가 받았던 부정한 특혜에 매우 분노하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대학의 이름과 스펙이 중요하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학업에 매진하고, 특히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은 경제적 이유에서 서울로 가기보다 그 지역의 국립대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데 그 문은 그리 넓지 않다. 부모의 부정한 권력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정유라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어린 학생들에게 깊은 상처가 됐음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아이들 아니 시민 모두가 박탈감으로 괴로워하지 않는 공정한 사회, 바로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바라는 궁극적인 가치일 것이다.

예향의 도시 전주인 만큼 무대에도 창이 울려 퍼졌다. 한복을 곱게 입고 무대에 선 한 대학생은 박근혜 정권 퇴진하라는 가사를 진도 아리랑에 붙여 노래했다. 무대 아래 촛불을 든 만 명의 시민들은 진도 아이랑의 후렴 "알이 아이랑 쓰리쓰리랑 알아리가 낫네~"를 합창하며 촛불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흥이 났고, 앙코르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시민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땅을 갈아엎는 트랙터를 앞세우고 서울로 진군하는 농민은 그들이 서울에 도착할 12월에는 박근혜 정권을 갈아엎어야 한다며, 이 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농업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정부에 분통을 터트렸다. 

중년을 넘긴 한 남성은 박근혜 욕을 해주려고 무대에 올라왔다며 쌍으로 핀 연꽃 이야기를 꺼내다가 마지막에는 "박근혜는 쌍X"이라고 쩌렁쩌렁하게 욕을 하다 내려갔고, 한 아주머니는 어지러운 시국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는 호소와 개인사를 꽤 길게 이어갔다. 그들의 발언에는 조목조목 한 논리가 부족했지만 박근혜와 일당들을 질타하는 모두의 성난 마음을 대변했다. 과거, 시민 단체의 대표나 엘리트들이 주도하던 운동 방식에서 벗어나 일반 시민이 일상의 화법으로 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발언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로 다가왔다.


집회의 일정이 마치기 전 꼭 한마디 하고 싶다는 여대생이 무대에 올랐다. 앳된 목소리의 그녀는 알바를 하고 이곳을 지나다 박근혜를 "쌍년"이라고 욕한 발언을 들었다며, 듣는 여성으로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지 맙시다." 집회를 시작하며 사회자가 했던 발언이기도 했다.

아버지뻘 나이 아저씨의 발언을 듣고는 무대에 올라 차분하게 자기 할 말을 하고 내려간 그녀에게서 2016년, 한국 사회의 모습이 투영된다. 대통령과 새누리당, 기득권 정치 세력은 썩을 대로 썩었지만, 시민 사회는 정체되고 썩어버린 정치판과는 다르게 시나브로 성숙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기성 세대의 '그 나이' 때보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을 보니 "헬조선"이란 불명예스런 별명의 대한민국에게는 보다 희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이 예감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다. 전북도민 총궐기대회에 참여하며 언제나 그 말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는 썩은 진탕이 고여 있지만, 큰 강을 이루며 유유히 흐르는 아래 물은 비교적 청명하게 흐르고 있다. 이제는 아랫물의 도움으로 구린내 나는 윗물의 진탕을 걷어내야 할 때다.

#촛불집회 #전주 총궐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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