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전은 몇 시에 시작합니까?!"
메이저리그 총재 사무실에 모인 기자들은 한목소리로 질문했다.
1976년 가을, 막바지로 치닫던 미국 대선은 박빙 승부였다. 8년 만의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민주당과 스캔들로 얼룩진 집권당 공화당의 대결은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갈등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야구 팬들의 관심사는 월드시리즈 5차전 일정에 가 있었다.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그해 월드시리즈 첫 3 경기를 승리한 신시내티 레즈는 10월 21일 목요일 저녁 양키스타디움에서 4차전을 앞두고 있었다. 만약 그날 양키스가 승리해 연명한다면 다음 날 저녁 5차전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금요일인 22일 밤 9시 30분에는 대선후보의 마지막 TV 토론회가 잡혀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행사의 중계권을 같은 방송사 NBC가 갖고 있었다.
메이저리그는 난감했다. 월드시리즈 5차전을 주중 대낮 또는 초저녁에 시작하면 시차상 몇 시간 늦은 중서부와 서부 지역 팬들은 경기를 아예 볼 수 없었고 시청률은 한없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대선후보 토론회가 끝나는 밤 11시경에 경기를 시작하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TV가 없는 프로야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야구는 TV의 대중화로 급성장했다. 구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팬들에게 경기를 클로즈업, 롱샷, 슬로우모션과 함께 해설로 생생하게 중계해주는 TV덕분에 야구는 발전할 수 있었다. 막대한 자본이 오가는 프로야구에 TV는 단순 매체가 아닌 원동력이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 사회는 '순진'해서 대선이라는 국가적 대사가 야구보다 중요하다고 여겨 대다수 미국인들은 방송사와 메이저리그 측에서 경기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과연 1976년 미국에서 벌어진 야구와 정치의 편성 다툼은 누가 이겼을까? 다행히도 그해 월드시리즈는 신시내티 레즈의 4연승으로 끝나 5차전은 열리지 않았다.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야구도 정치도 아닌 방송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야구나 정치가 아닌 미디어가 주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40년도 지난 일을 들먹이는 이유가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선과 프로야구 시즌이 겹쳤다. 지난주에 개막한 프로야구를 보궐 대선이 상당 부분 '잘라 먹고' 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얼마전 일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쿠바-일본전을 놓치기 싫어 다급히 귀가했다. 하지만 볼 수 없었다. 2017 WBC의 독점중계권을 가진 JTBC의 3개 채널 모두 중계하지 않았다. 방송, 인터넷 그 어디에서도 WBC 우승 후보인 일본과 강팀 쿠바의 경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나의 알 권리와 볼 권리가 박탈당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채널이 무한대로 늘어나도 콘텐츠의 질과 다양성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으며 화가 났다. 무한반복 재방송되는 예능프로와 정치권에 기생하는 시사 평론가들의 토크쇼는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방영되지만, 정작 같은 시간대 옆 나라에서 열리는 중요한 야구경기를 생중계로 볼 수 없다는 현실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국 대표팀이 1라운드에서 탈락해 WBC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미 있는 국제경기를 무시해버린 방송사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JTBC 관계사의 야구 기자에게 항의성 문의를 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시청률이었다.
WBC 한국 대표팀 경기의 시청률은 <뉴스룸>의 반 정도 됐다고 한다. 요즘 한국 정치의 막장 '리얼리티 쇼'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했다. 대중 다수는 정치인을 혐오하지 정치를 혐오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한 이슈가 사회의 이목을 죄다 빨아먹는 현상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야구 팬 입장에서는 섭섭했지만, 공영방송도 아닌 JTBC가 시청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방송사는 엄연히 수익을 추구하는 영리 집단이다. 오히려 그 많은 국내 팬들이 왜 쿠바-일본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자국팀이 떨어졌다고 국제대회에 흥미를 잃는다면 왠지 야구를 제대도 즐기는 팬 같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뉴미디어가 판을 쳐도 TV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좋고 싫고 옳고 그름을 떠나 대중 다수의 문화생활은 TV에서 시작한다. 폭넓은 콘텐츠를 접하고 싶다면 시청자들의 관심사가 다양해져야 한다. 수요자들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 콘텐츠의 깊이와 수준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의 기호와 기준이기 때문이다.
야구를 지키는 촛불
촛불집회는 민주주의를 되찾아 왔다. 민주주의는 품위 있는 삶의 방식이자 문화다. 야구 역시 문화다.
야구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인들만의 문화는 아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군사독재정권의 통치수단으로 출범했지만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이 아닌 일반 팬들이 지키고 키워낸 문화다.
이제는 한국 팬들도 자국 위주의 팬덤에서 벗어나 야구 자체를 넓고 깊게 즐기고 이해하는 수준에 왔다고 본다. 한국 팀, 한국 선수에게만 관심을 갖고 응원하는 이들의 인식 지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촌스러운 편협함은 스스로를 우물 안 개구리로 고립시키는 자충수일 뿐이다.
미적 감각이 있는 이들 중 자국 예술만을 선호하는 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 오직 정치 경제적인 논리에 오염된 이들만이 그런 행태를 보인다. 어쩌면 인류사를 관통해 진화하는 문화라는 큰 흐름 안에서 이념은 양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알 수 있다. 많이 접해봐야 본질이 보이고 본질을 알아야 발전이 가능하다. 타인과 교류해야 자신을 제대로 반추할 수 있고, 다른 세상이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생에서 감동을 바라기는 어렵다.
엽기적인 정치 스캔들로 역사적 전환기에 들어선 한국 사회의 관심이 정치에 심하게 쏠리고 있다. 균형감각을 잃은 '만인의 정치화'가 문화적 기근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치가 문화를 융성하거나 향상시키기보다는 짓밟은 사례를 우리는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보궐대선 정국이 단순히 야구만을 잘라 먹는 게 아니라 우리 삶 자체를 갉아먹는 것 같다.
개개인에게 세상을 다르게 또 다양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문화는 우리 삶에 '여유'와 '이유'를 동시에 제공한다. 한 공동체의 품격은 구성원들의 문화적 저력에서 드러나고, 한 사회를 결속하는 진정한 통합은 정치가 아닌 문화가 이뤄낸다. 우리가 바라는 많은 변화의 시작 역시 거대 권력이 아닌 일반인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세금으로 고용한 정치인들이 태만하게 굴자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수동적인 소비가 아닌 주동적인 참여가 변화를 만들어낸다. 미디어는 우리의 수요를 알아서 챙겨주지 않는다. 문화적 개선을 원한다면 시청자들부터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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