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잃은 아빠와의 일상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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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서 질문을 던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이해하기 쉬운 질문과 짧은 답변만 오갔다. 나 태어났을 때를 물었을 때는 아빠는 또 한 번 웃었고, 엄마를 만났던 얘기를 하실 땐 그보다 더 밝게 웃었다.
"엄마 참 예뻤어.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집까지 따라갔어." 제대로 결혼식도 못 올리고, 같이 산 세월이 40년이다. 사는 게 고되서였을까, 나 어릴 적 우리집은 화목한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아빠가 병들고 나니 엄마는 아빠의 손과 발, 이젠 귀와 입까지 됐다.
"니 엄마가 고생 많았어. 돈이 없어서." 이번엔 아빠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우리 집은 왜 망했는지, 술은 왜 그렇게 드셨는지 물었더니 이번엔 씁쓸한 미소로 긴 설명을 대신한다. "난 그냥 그렇게 살았어." 체념하듯 내뱉은 아빠의 말. 할아버지, 고모, 작은 아빠를 해마다 차례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아빠는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그게 내겐 대답이 됐다.
"소리 하나도 안 들려 많이 답답하지?" 답답해 힘들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아빠의 대답은,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뭐." 그냥 그렇게 살았다던 아빠는 이제 그냥 이렇게 살아야지 한다.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살아지는 생. 그런 생 굽이굽이가 궁금한데, 자세히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온 아빠의 삶에도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고 했다. 고향에 머물 곳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고향에 왔다갔다 하며 지내고 싶다고.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 멀어서 잘 가지도 못하는 고향, 아빠는 고향을, 그 바다를 쭉 마음에 품고 사셨나 보다. 그곳엔 고생스러운 지난 시절이 아닌, 무얼 몰라 행복했던 아빠의 유년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7년만의 대화아빠를 만나고 오던 날, 집에 거의 도착해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운전이 자신 없는 난 어지간해선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한 할아버지가 앞서 가시는데, 천천히 뒤따라가도 도통 비킬 생각이 없으신 것 같다. 경적을 울려야 하나 몇 번 고민하다 그냥 뒤따라갔는데 얼추 몇 백 미터 되는 거리를 가다 보니 조금씩 짜증이 났다.
'아니, 좀 비켜주지. 왜 저렇게 대책 없이 앞에서 막고 있는 거야.'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아, 저 어르신도 우리 아빠처럼 못 듣는 분일 수 있겠구나.' 그 이해만큼 아빠에게 한걸음 다가간 건지, 아빠에게 다가간 걸음만큼 이해가 깊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맹추위가 기승이었던 며칠 전,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날씨가 많이 추워요. 따스하게 입고, 감기 조심하세요." 조금 뒤, 답장이 왔다.
"딸아, 고맙다."아빠는 한 번도 나를 '딸아'라고 부른 적이 없다. 오늘도 누가 적어준대로 보고 쓰신 게 분명하다. 어색하고 짧은 메시지지만, 아빠가 내게 말을 건다. 7년 만이다. 나는 아빠의 삶에 발걸음을 내딛고, 아빠는 내게 말을 건넨다. 변한 건 없지만 서성이던 거리는 그만큼 좁혀졌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로 더듬더듬 걸어 들어간다. 두려움 한 겹 벗겨낸 채, 조금씩 아빠의 삶으로. 이제야, 이제라도 걸어서 간다. 소리 없는 세상이지만, 아직은 아빠에게 말을 건넬 수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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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아빠가"... 7년만에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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