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극장 나무와 물이 있던 건물. 간판은 달려있지만 내려가는 통로는 닫혀있다.
허지원
[기사 수정 : 18일 오후 3시 59분]
'당신이 되살아나는 곳'. 대학로 끝자락, 주황색 둥근 간판이 예술극장 '나무와 물'로 통하는 길을 안내했다. 9층 건물 지하는 극장이 자리했던 곳이다. 바깥 통로에는 셔터가 내려와 있었다. 건물 안 계단으로 내려가자 깜깜하고 텅 빈 공간이 나왔다. 예술극장 나무와 물은 5월 1일 폐관했다. 지난 9월, 극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흰색 메아리만이 남았다.
본래 객석과 무대가 있던 지하 1층은 아직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했다. 건물주는 그곳을 더는 공연장으로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극장을 운영하던 정유란 문화아이콘 대표는 건물주의 요구에 따라 공간을 원상복구했다.
정 대표가 들어오기 전부터 극장이었던 곳이지만, 계약 기간 중간에 나오려면 하는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공연이 중단되고 2월부터 월세가 밀렸다. 6개월 더 버티면 빚만 쌓일 터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 9월 21일과 11월 8일, 정 대표에게 코로나19가 연극계에 남긴 상흔에 대해 물었다.
5월, 모든 공연이 멈췄다
예술극장 나무와 물은 김성수 연출가가 2003년에 지은 극장이다. 그는 10년 동안 극장을 운영하고, 2013년 정 대표에게 물려줬다. 극장장 8년 차인 정 대표는 아동극 <구름빵>, 연극 <도둑맞은 책>,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등 직접 제작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며 나무와 물의 브랜드를 구축했다. 100석 규모 소극장인 나무와 물은 혜화 중심가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혜화동 1번지, 연우무대와 함께 대학로 극장가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극장을 운영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임차료만 매달 650만 원이 나갔다. 같은 크기인 지상층 월세보다 3배 이상 비쌌다. 화장실과 같은 시설을 수리하고 설비를 교체하는 데도 1억 원 넘게 들었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극장은 유지∙보수비가 많이 든다. 그래도 꾸역꾸역 버텼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연을 쉬지 않았다. 관객들이 예매를 취소하는 일은 있어도, 극장이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 타격'인 코로나19가 닥쳤다.
2월 말부터 정부 및 지자체 산하 공연장은 잠정 폐쇄되고 공연들은 줄취소됐다. 극장에서 감염이 전파된 경우는 없었지만 감염병 예방 차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 때문에 민간 극장도 위축됐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방역해가며 공연을 진행해도, 공공극장이 닫으면 극장이 안전하지 않다는 시그널을 주거든요. 스스로 안전을 지켜가며 방법론을 찾아야죠."
<구름빵>은 어린이 공연이라 코로나19 영향이 컸다. 정말 공연하는지 관객들 문의가 빗발쳤다. 일단 공연을 중단하고 3월에 재개하기로 했다. 뮤지컬 <사랑을 비를 타고>는 2월 중순에 새 기수와 공연을 시작했다. 원래 4개월 공연인데 2주도 못하고 멈췄다. 5월에 다시 진행하자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두 달을 대기했다. 하지만 그 후 예술극장 나무와 물에서 공연을 올리는 일은 없었다.
4월 말 폐관을 결정하고, 철거 전까지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건물주는 빨리 나가지 않으면 5월 월세까지 받겠다고 했다. 정 대표는 팔 수 있는 건 팔고 나눌 수 있는 건 나눴다. 객석 의자 100개는 대전에 극장을 짓겠다는 이경재 이모션콘텐츠 대표가 와서 뜯어갔다.
당근마켓과 중고나라도 이용했다. 가볍고 작은 공연 소품들은 팔렸지만, 부피가 큰 피아노는 인기가 없었다. 철거 전 배우가 펑펑 울며 마지막 연주를 하고 갔다. 100만 원에 산 피아노는 5만 원만 받고 악기상에게 돌려줬다. "보증금에서 철거비와 밀린 월세를 제하니 회수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정 대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극장이 사라졌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 있어요. 그 공간에 많은 에너지를 썼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