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스승의 날이 다시 되살아난 이유가 불편하다' 유감

등록 2021.05.18 15:55수정 2021.05.1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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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교직에 들어선 것은 2005년이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지금처럼 선생님을 '샘'이라 부르지 못했다. ' 국어 선생님'을 찾는다고 해도 '야, 여기 국어 선생님이 한 분만 계시냐? 성함을 말해야지.' 그렇게 말하던 때가 있었다. 당연히 선생님의 성함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부르고 요청하는 데에 아이들은 성의를 들여야 했다. 그러던 것이 효율과 친근함이란 명목 하에 '국어선생님'을 거쳐 '국어샘' 또는 '김샘', '샘' 정도로 줄어들었다. 나는 그런 변화의 과정을 겪어 왔다.

그러나 다른 직업을 이르는 말들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와는 달랐다. 오히려 과거 '딴따라'라는 속칭을 가졌던 배우들은 서로를 '배우님'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영화를 찍었다'고 하지 않고 '작품을 찍었습니다'라 말하며 자신의 직업과, 자신이 하는 일에 격을 세우기 시작했다. 청소부였던 직업명은 '환경미화원'이란 글자 효율성에 역행하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목욕탕에서 '때밀이'라 불리던 분들도 스스로를 '세신사'라 칭하기 시작했다. '경찰관'은 그대로 경찰관이었고, 소방관도 그러했고, 군인이나 여타 직종들도 그러했다.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교사만이 '샘'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이 '샘'이 되면서 교사의 입지는 확실히 글자만큼이나 비좁아졌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아이들은 OOO 선생님을 '샘'이라 부르며 그 선생님의 독특한 특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듯 보였다. 다만 그들에게 필요한 어떤 부속품처럼 생각되지는 않는지 갈수록 회의스런 생각이 들곤 한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OOO 선생님이 하는 수업에선 학생들이 그 수업만의 독특성을 (그것이 좋든 싫든)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요즘 샘의 수업은 학원강의나 인터넷 강의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무언가-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코로나 이후 화상수업을 통해 더욱 그런 느낌은 강해졌다. 이러다가는 '수업'도 그 효율성과 편의에 따라 학생들에게 '쉅'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샘'이 되면서 교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위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혼동하지 마시라. 권위와 권위적이라는 말은 크게 다르다. 권위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이러하다.

권위 (權威) [명사] 1.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2.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는 학생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권위'가 필요하다. 그것을 '샘'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일이다. 급식줄을 세우던 동료교사가 아이에게 새치기하지 말라고 줄 서기를 요구하자 아이는 문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놀란 교사가 잘못된 행동임을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하자 학생은 흘려 듣고는 더 성질을 부릴 수도 있다는 듯 제스츄어를 하며 가버렸다.


이후 이 아이를 불러 한참의 상담 끝에 표면적인 사과를 받아냈지만, 교사의 정당한 요구를 너무나 쉽게 무시하는 아이의 태도는 심히 우려스러웠다. 이런 일이 학교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일부러 교사에게 들릴듯 말듯 '씨X'이라는 욕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아이, 수업 중에 큰 소리로 친구와 얘기해 의도적으로 수업을 방해해 지적을 당하고도 자신이 뭘 어쨌냐는 듯 당당하게 구는 아이 등 나는 교사의 권위가 떨어진 것을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럴 때 교사는 학교규정을 기준삼아 지도하고, 지도가 되지 않을 경우 학교생활인권규정을 바탕으로 그 선도절차를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애매한 상황에서 일일이 규정을 적용시켜야만 교사의 지도가 가능해진다는 생각은 가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선생님'이 '샘'이 되면서 권위적인 부분이 사라지며 나타나는 여러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두려워하던 교무실 문턱이 낮아져, 질문을 하러 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나펜을 빌리러 오기도 한다. 교무실의 '샘'들은 코로나 때문에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업무로 바쁘면서도 그 아이들의 요구를 대부분 반갑게 받아준다. 체벌도 없어졌고, 개인적인 부탁과 공무적 부탁을 교사들은 구분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지고 세분화되고 추가된 업무 때문에 더 피곤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더 마음을 열기로 교사들은 이미 각오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연대하는 교사잡것들(아래 연교)'이라는 단체에서 스승의 날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학교에서 스승의 날을 구실로 수직적 권위를 엎드려 절받기로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 탄신일로 왕적인 권위를 교사 스스로가 학생을 감사연습을 시킴으로써 세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가 필요하다. 이런 글 정도가 되겠다. 내 해석은 주관적일 수 있으니 혹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까 링크를 남겨둔다. (관련 기사 : 스승의날이 다시 되살아난 이유가 불편하다 http://omn.kr/1t67p) 

이 글에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선생들에 대한 비판의 글, 그들의 권위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 상당수 있었다. 문제는 이 글이 1. 지금, 2. 교사(연-교는 교사 단체란다.)에 의해, 3. 스승의 날에 맞춰 쓰여졌다는 데 있다. 

첫째로, 지금 교사의 권위가 적절하게 제대로 서 있다고 보는가? 이 글이 20여년 전, 그러니까 교사가 권위적일 수도 있었던 시대에 쓰여졌다면, 나는 이 글을 환영했을지도 모른다. 교사가 폭언을 해도 아이들이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수긍해야만 하는 분위기였다면,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권의 추가 교사에게 심하게 더 쏠려 있다면(물론 둘 사이의 인권의 무게를 시소처럼 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빠른 이해를 위해) 이렇게 과격한 글을 통해 그 무게를 옮기는 것이니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교사가 '권위적'으로 행하는 시대가 아니다. 학교가 학생이 교사에게 다가오기 힘겨워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참아내야 하는 인권적 사각지대인양, 또 교사는 이 공간에서 수직적 권위를 누리는 것이 일반적 모습인양 일반화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다.

둘째로, 저 글을 쓴 주체가 교사라니 -이것은 몽매한 교사집단이 자성할 수 있도록 일깨우거나, 또는 외부로 사실을 알리는 객관적인 글도 아니다. 연대하는, 그러니까 약자와 연대한다고 했는데, 약한 자를 지키기 위한 수단인지, 자신을 교사잡것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경악한다. 내가 교사니까.

앞에 수식, '연대하는'을 붙혔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확실히 말한다. 나도 연대한다. 미얀마와 연대하고, 현장에서 죽고 만 내 제자뻘의 청년과 연대한다. 그리고 아무리 연대하기 위해 낮추는 말이라도 '교사잡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꼭 잡것들을 써야겠다면 교사를 빼시라. 그냥 당신들만 '잡것'이면 된다. 교사의 뒤에 잡것들이라는 구린내나는 언어로 교사라는 단어가 가진 격을, 프라이드를 훼손시키지 말라.

이 시대, 한국의 교사들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학교배움을 이어가기 위해 밤낮으로 분투했다.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아이들을 전화로 깨우고,  출제를 하고, 보충수업까지 한다. 그런 이들을 이르는 명칭, 교사 뒤에 잡것들을 붙이는 행위는 참으로 사명감을 꺾는다.

셋째, 십분 양보하더라도 스승의 날에 이런 글을 쓰는 건 지양했으면 한다. 스승의 날,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사 스스로가 엎드려 절받기를 한다? 아니, 오히려 학교에서는 혹여 스승의날 행사를 권위적인 행태로 오해할까 쉬쉬하는 분위기다. 학교에서 혹여 스승의 날 행사로 교사에게 그 전날에 선생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면, 그것은 스승의 날을 취지로 감사를 연습하는 교육적 취지이지 강요일 수 없다. 어디 요즘 친구들이 감사를 강요한다고 무조건 감사를 받아들이게 되는 수동적 세대인가? 오히려 연교에서는 지금의 학생들을 감사를 강요하면 강요되어지는 대로 움직여주는 수동적 존재로 낮추어 보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1년 넘게 거치며 우리, 교사의 피로는 극에 달했다. 화상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에게, 학부모에게, 매달리듯 전화하고, 새로운 수업방법을 찾아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노이즈 마케팅이 짭짤한 재미를 보는 경우도 많다. 많은 성인들 머릿속에는 그들이 다니던 옛학교의 모습과 옛학교 선생님들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선생님'은 권위적인 교사의 텁텁한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연교의 글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선생님'들은 이미 학교에 없다.

오히려 권위를 잃어 때로 위태로운 '샘', 피로함 속에서도 제 일을 하며 마음을 열고자 하는 교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 힘겨운 때에 한국교육이 바로 서기 원한다면,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칠 진정한 스승이 학교에 있기를 원한다면, 코로나 시대를 버텨낸 교사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때 사기를 꺾는 글이 과연 이 시대 선생님과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자성해 보시길 바란다.
#스승 #교사 #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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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학을 근간으로 강의와 컨설팅도 하며 시를 내재적 관점으로 풀이하며 아이들을 상상케 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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