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제를 탄생시킨 춘향영정60여년간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최초 춘향영정.이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면서 춘향제는 시작되었다.
남원향토박물관
그 때 김은호가 그린 춘향이는 일본과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일본 전통극 가부키 형식의 춘향전에 등장하는 얼굴 하얀 춘향이었다. 그리고 그 춘향이를 16세 아가씨로 그렸다. 본래 영정은 어사부인이 된 30대 쪽진 머리를 한 춘향이였는데 말이다.
일제는 봉안식이 아니라 일본의 신사에서 하는 '입혼식'을 한 뒤 본래 있던 영정 위에 일본 춘향이를 덧세우게 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이중 봉안이었다. 그런 치욕을 견디며 해방을 맞았건만 친일파 청산이 안 됐듯이 김은호가 그린 영정도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누군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칼로 찢어 버렸다. 일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전남 이사장이었던 현준호도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렇게 끝났다면 오늘의 영정 싸움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1년, 6.25때 훼손되어 없어진 영정과 똑같은 영정이 다시 춘향사당에 쳐들어 오는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는 명령과 함께 원래 영정을 내쫓고 김은호가 새로 그린 춘향이를 다시 올린 것이다. 그 춘향이는 예전에 없어진 것과 거의 똑같은 왜색 춘향이 그림이었다.
2021년 올해는 최초 영정이 쫓겨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 놓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1966년 신문 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조차도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잊혀진 이름 최봉선과 최초 영정의 존재는 작년 친일화가 김은호의 그림을 내린 뒤 다시 떠올랐다. 영정이 남원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남원시는 당연히 그 영정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부 시의원들이 좀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봉안을 막았고 거의 1년 가까이 시민들의 뜨거운 원성을 무시한 채 봉안을 미루고 있다.
미루는 것뿐만 아니라 작년 12월부터 '춘향영정 제작(선정) 기본계획 용역' 설문조사(최초 영정 봉안이 우세하게 나왔으나 발표하지 않음)와 연구용역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그리기로 작정한 것이었기에 연구용역 결과는 그런 결과가 나왔다. 미술사 관련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보고서만 내놓고 지금까지 발표의 의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원시는 최근 연말 안에 제3의 작품을 공모할 계획이라고 언론(7월22일 연합뉴스)을 통해 밝혔다. 그 이유는 최초 영정의 작가가 정확하지 않고(강수주 화백 낙관이 없고) 소설 속 춘향이는 16세인데 반해 영정 속 인물은 30대 어사부인이고 복식이 조선시대가 아닌 1920년대라는 이유다. 시가 이렇게까지 영정을 새로 그리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시민들은 몹시 궁금하다. 최초 영정은 안 된다면서 시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대한 답은 내가 알려주겠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그린 영정에 누가 낙관을 찍을 수 있겠는가? 본래 영정에는 낙관을 안 찍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김수로왕의 영정도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잘 봉안되어 있다.
복식과 나이가 안 맞는다고 했다. 최초 영정은 소설 속 예쁜 춘향이를 그린 게 아니다. 모진 고난을 이기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한 열녀를 그린 것이다. 그 항거정신과 한 남자를 향한 정절을 우리 민족을 향한 것으로 바꿔서 영정을 그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복식과 열녀로서 완성된 30대 어사부인을 그린 것이다. 열여섯살 예쁘기만한 어린 춘향이에게 뭐하러 제사를 지내겠는가? 이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저런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축제인 춘향제의 위상은 최초 영정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악용된 춘향제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매우 가치있는 일이고 굵은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뜻깊은 일이다. 1931년작 최초 춘향영정은 미술 작품이 아니고 영정이며, 박물관이 아니라 반드시 사당에 봉안되어야 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4
역사동화를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유하기
춘향 영정 공모하겠단 남원시... 납득할 수 없는 이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