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중앙회가 통합콜센터 용역업체를 바꾸는 과정에서 제안서에 "희망직원 100% 고용 승계"를 명시했던 효성ITX는 정작 계약 때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희망연대본부
간호사 생활 10여년 만에 하나씨가 얻은 건 극심한 불면증과 원형탈모증이었다. 근무시간이 계속 바뀌는 3교대 근무로 생체리듬이 완전히 무너진 탓이다. 근무시간이 일정한 일을 구하다가 콜센터 상담일을 하게 됐다. 카드사와 홈쇼핑 콜센터에서 일할 때는 여유도 생겨 쉬는 날엔 유기견 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다가 계속 마음이 가는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반려동물도 생기고 생활도 안정됐지만 일이 쉽지는 않았다.
"간호사는 체력과 정신 둘 다 힘든데 콜센터는 체력적으로는 덜 힘들어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이직을 했지요."
일을 잠깐 쉬고 강아지만 돌보던 중 저축은행중앙회가 통합콜센터를 개소하면서 상담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집에서 10분 거리였다. 오후 8시부터 오전 9시까지 근무하는 심야조도 있었다. 유기견이 겁이 많아 낮에 돌볼 수 있는 일을 찾던 터라 반가웠다.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가자 바로 출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9년 9월, 하나씨는 처음 문을 여는 통합콜센터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고객에게 욕먹으며 쌓은 전우애
통합콜센터 심야조는 급여가 150만원 남짓으로 간호사 때에 비하면 많이 적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삶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근무조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사 다니면서 이렇게 맘 맞는 사람들 만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하나씨와 동료 상담노동자들은 일종의 전우애로 끈끈하게 묶인 사이였다. 저축은행중앙회는 통합콜센터를 열면서 SB톡톡플러스라는 은행앱도 만들었다. 전국 69개 저축은행이 함께 쓰기 때문에 메뉴들을 찾기도 복잡한데 앱이 오류가 날 때도 많았다. 변변한 상담 매뉴얼도 없는 상황에서 쏟아지는 고객들의 문의와 민원을 최전선에서 받아내는 건 상담노동자들이었다. 그만큼 욕도 많이 먹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란 멘트가 입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쩔쩔매며 눈물을 쏟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면 위로가 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곁에 있는 동료들이었다.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금방 그만두고, 또 새로 왔다가 바로 나가고 그랬어요. 저는 직장을 금방 때려치운다는 생각은 못하고 힘들어도 버텼죠."
혼자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함께 버티기 위해 원청도, 하청업체도 알려주지 않은 고객응대 매뉴얼을 동료들과 머리 맞대고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냈다.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성희롱성 발언을 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다른 업체 매뉴얼을 찾아가며 '쿠션 멘트'를 짰다. 그렇게 완성한 매뉴얼을 책자로 만들어 인쇄하는 비용까지 모두 상담노동자들이 부담했다. 조금씩 콜센터의 틀이 잡히자 떠나가는 동료들도 줄어들었다.
똘똘 뭉쳐 부당함에 저항도
똘똘 뭉쳐 작당모의도 많이 했다. 초기 월급명세서엔 기본급, 야근수당 등만 찍혔다. 명절수당, 휴일수당 등이 있는지도 몰랐다. 한 직원이 관리자에게 물어봤다가 "업무강도도 높지 않은데 그런 걸 왜 따지느냐?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말만 들었다.
"거기서 7개월을 주는 대로 받고 살았으니까 왜 그런지만 잘 설명해주면 사실 따질 생각도 못할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모욕적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근로기준법 찾아보고 법에 어긋난 부분들을 다 찾아서 책자로 만들어 본사를 찾아갔지요."
윽박질로는 노동자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본사에서 조사를 벌인 끝에 관리자는 인사 조치되고 상담노동자들은 그동안 못 받은 수당 일부분을 보전 받았다. 그동안 눈치 보여 제대로 쓰지 못하던 연차나 월차도 조금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하나씨와 동료들의 단결력은 종종 빛을 발했다. 한번은 막말을 한 민원인이 오히려 상담노동자에게 사과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매니저는 상담노동자들을 방패막이 세우지 않고 스스로 나섰다.
"고객팀, 상담원들도 감정노동보호법에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상담원이 자기 권리를 이야기한 상황이어서 사과를 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자 고객보다 저축은행중앙회 직원이 더 노발대발했다. 매니저에게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회사 출입증을 뺏었다. 매니저도 이렇게 쉽게 자르는데 "우리는 얼마나 자르는 게 쉬울까?" 용역업체 직원의 현실을 목도한 하나씨와 동료들은 다시 뭉쳤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대자보를 썼다. '현장에 관리자가 없으면 업무가 마비됩니다'라고. 대자보는 붙이자마자 저축은행중앙회에 의해 바로 떼어졌다. 포기하지 않았다. 떼어지면 다시 아침에도 붙이고 밤에도 붙였다. 상담노동자들의 집념이 통했는지 비 오는 날 미처 떼지 못했던 대자보를 출근하던 저축은행중앙회 회장이 보게 됐다. 회장은 문제 해결을 지시했고 덕분에 매니저는 복직했다.
모든 일이 이처럼 해피엔딩이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냉혹했다. 복직했던 매니저도 결국 몇 달 뒤 일터를 떠나고, 똘똘 뭉쳤던 상담노동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고야 말았다. 저축은행중앙회가 통합콜센터 운영을 맡긴 용역업체를 바꾸면서 벌어진 일이다.
효성ITX, '희망직원 100% 고용 승계' 약속 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