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교사 사망 사건과 관련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인근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참가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2일 보신각 집회의 끄트머리에 잠시 서서 '과연 무엇이 이 젊은 선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생각했다. 교사를 하는 후배나 제자들로부터 고충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 있다면 나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고통과 자괴감에 대해 같은 선생으로서 공감,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미안함, 그 늪에서는 조금은 비켜 서 있다는 안도감이 한데 어우러져 소용돌이쳤다.
무엇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교권과 학생인권의 관계다. 지금 윤석열 정권과 보수층은 마치 교사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진보교육감들을 비난하며 학생인권조례의 폐지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교권과 학생인권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다. 국가든 작은 집단이든 인권이 보장될수록 불만·갈등·폭력·차별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이가 타인도 올바로 사랑하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자가 타인도 귀하게 여긴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고 자존감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타인에게 폭언과 폭행을 삼간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권위를 갖는 교사일수록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면서 잘 가르칠 수 있고, 인권을 갖춘 학생일수록 교사를 잘 섬기고 따른다. 교육은 교사가 학생에게 단순히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고 전해주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교사가 학생의 머리와 가슴에 내재한 사랑과 지혜와 공감을 드러내서 발달시키고 그를 통해 교사 또한 완성을 꾀하는 부단한 상호작용이다.
문화와 권력
문제는 문화와 권력이다. 필자가 대학 새내기 때 외할머니의 부고를 받고 제천으로 달려갔었다. 버스에서 내려 외가로 가는 길에 지나가던 모든 아이들이 멈춰서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외가가 한미한 집안이기에 참 의아했다. 나중에서야 이곳 아이들이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무조건 선생님으로 착각했음을 알았다. 초등학교 때 화장실에서 나오는 선생님을 처음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이윽고 선생님도 물질대사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모든 선생님은 사표(師表)였고 삶 자체가 교과서였다.
하지만 문화가 달라졌다. 2023년의 교육예산은 96조3000억 원에 이르고, 2022년의 사교육비는 26조 원에 달한다. 100조 원을 넘게 들여 경쟁심과 이기심을 조장하고 창의력과 인간성을 저하하고 교실을 우정과 사랑과 연대의 장이 아니라 경쟁과 폭력과 자살충동의 장으로 내몰면서 99%의 학생을 명문대에 못 가는 '실패자'로 만드는 것이 한국 교육이다.
다만, 지식의 효율성이 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대학 서열화 해체와 입시 철폐 없이는 그 어떤 교육정책이나 대안도 미봉책에 그친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는 일타 강사가 선생님보다 더 필요하고 더 권위를 갖는다.
디지털화로 인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무수한 지식과 정보를 접하기에 교사가 이제 유일한 지혜의 전수자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장기화하면서 경쟁심과 이기심, 물신주의가 극점에 이르러 자신의 부모보다 낮은 연봉을 받는 교사는 아랫사람으로 보인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이 명문대에 가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교사나 다른 학생에 대한 압박, 폭언, 소송도 불사한다.
인간관계에서는 권력이 작동한다. 거시권력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연봉, 나이, 학력 등이 미시권력을 형성한다. 사랑과 우정, 섬김, 공감, 존경이 권력을 깨고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데 학교에서 이것이 사라지니 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 사이에서 권력 싸움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서 교사든 학생이든 '을'에 놓인 이들이 늘 폭력을 당하고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대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