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인천퀴어문화축제 중 ‘함께하는 축복식’에서 이동환 목사가 꽃잎을 뿌리고 있다.
주피터
- 두 번째 감리회 재판이 진행 중이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이번에는 두 번째 재판이기도 하고 이미 그간의 활동으로 인해 제가 '확신범'처럼 되었다. 그래서 진짜 직을 걸어야겠다 싶어서, 방어적으로 나가지 말고 동성애가 왜 죄인지 질문을 던지자는 각오로 재판에 임했다. 그런데 웬걸, 그럴 틈도 없이 절차에 하자가 너무 많더라.
검찰 역할을 하는 심사위원회는 기소장에 어떤 조항을 적용했는지만 적어놓고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적지 않은 '백지 기소장'을 냈다. 게다가 심사위에는 규정상 피고발인과 같은 지방회(교단에서 정한 행정구역) 소속 목사가 있으면 안 되는데, 재판 도중에 저와 같은 지방회 목사가 심사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때문에 심사위가 기소를 포기해 공소가 취하됐는데 갑자기 재판이 부활했다. 이후 재판정에 나가서 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재판위원장이 마치 결론을 정해놓은 것처럼 "이동환이 '교리와 장정'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고발됐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다 보니 감리회 결정에 불복하고 사회의 일반 법정으로 가서 징계무효확인소송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성소수자 인권 활동이 범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재판에 임하는 이유는 감리회 절차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교단은 절차를 어겨가며 재판을 강행하고 있다."
- 긴 시간 스트레스와 압박, 온갖 음해에 시달리면서 공황장애 등으로 약을 먹고 안면장애 등도 겪었다는데 그간의 상황이 어땠나?
"저는 작은 일에도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울렁증이 있어서 사람들이 쳐다보면 다리가 풀린다(웃음). 처음 재판 때는 진짜 고생했다. 몸도 정말 안 좋았고 배탈을 달고 살았다. 감리회 내에서 동성애 관련 징계를 다투는 첫 사건이라 내가 뭘 잘못하면 다 망할 것처럼 부담이 들었다. 결정 하나하나가 살얼음판이었다. 내가 그다지 똑똑한 사람이거나 대단한 운동가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목사일 뿐인데…. 그때는 순교자 마인드로 '내 한 몸 불살라서라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두 번째 재판에 오면서 먹는 약은 늘었어도 스트레스는 덜하다. 지금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실하게 운동하자고 생각한다."
-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이 길을 계속 가게 하나?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말렸다. 교단은 못 바꾸고 너만 다친다고 하더라. 일종의 거래나 회유가 들어오기도 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래도 사회적 관심이 많이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다 잊었구나. 나 혼자 어떻게 싸워나가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워낙 첨예한 이슈다 보니, 이를테면 저를 지지한다고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가 재판받을 뻔한 일까지 생기면서 제가 조금씩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거다. 고립감과 우울감이 진짜 심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포기하면 제 안의 무언가가 망가질 것 같았다. 그리고 활동하다 보니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보이는 거다. 주변에 성소수자 성도도 많고 성소수자 후배들도 목회를 꿈꾸고 있다. 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사직을 준 것이기에 '직'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가 이 일로 교단을 떠나면 그냥 저한테 벌어진 불행한 일로 사건이 끝난다. 성소수자 성도들이 이 사건을 보고 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게 제 역할이다."
- 가족이나 교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원래부터 아내는 나보다 더 열심이었다. 아내가 인천퀴어문화축제 개신교 준비팀에서 활동했는데 사람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와서 제가 축복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후에 제가 흔들릴 때도 아내는 '역사에 부끄럽게 남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우리 교인들은 재판 기간 내내 방치됐다. 원래 재판으로 담임목사 자리가 비면 교단에서 목사를 보내주는데, 우리 교회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다행히 심지가 굳은 분들 중심으로 잘 뭉쳐서 '목사 없는 예배'로 버텼다. 교인들이 성소수자 의제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됐고, 기자회견 발언도 해주시고 성명도 내주셨다."
- 성소수자 인권단체 큐앤에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어쩌다 만들었나?
"제가 성소수자 당사자도 아닌데 비난이 너무 컸다. 재판을 받기 전에는 성소수자들이 이렇게 많은 혐오에 노출됐는지 몰랐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게 됐다. 첫 번째 재판 당시 감리회 본부 앞에서 천막농성을 했는데, 농성장에 모인 사람들과 밤새 얘기하다가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고 의기투합해서 만들게 됐다.
큐앤에이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교회를 변화시키고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단 성소수자 친화적인 예식서를 만든다. 지난해에는 장례예식서를 만들고 올해는 커플예식서를 만들었다. 기존 예식서가 성별이분법적이고 가부장 중심이어서 이를 바꾸고 평등한 예식을 만들자는 취지다. 교회 내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교육할 수 있는 자료도 만들고 교단 내 차별법을 개정하는 운동도 한다.
목사가 퀴어를 죄인이라고 하니 퀴어 기독교인은 '나는 죄인인가' 고민하고 그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사자들 무료상담을 진행한다. 또 당사자들이 모여 영화모임 등 다양한 활동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