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키신저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1983년 2월 키신저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1980년에 키신저는 미국 정부가 김대중구명에 나서도록 노력했다. 다만 이때 그는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실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 1973년 8월 김대중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있으면서 미국 외교정책 수립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키신저는 김대중의 구명에 관여하게 되었다.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구명에 나선 키신저
김대중 구명을 위해 미국 정부가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납치 범행 순간이 외부에 노출되어 사건 발생 1시간여 뒤에 미국 정부가 정보를 입수하고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미국 정부 차원에서 확보한 정보 외에도 하버드대학 재직 당시의 인연으로 알고 있던 김대중의 미국 내 후원자인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 제롬 코헨 하버드대 교수 등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기도 했다.
당시 코헨 교수는 키신저와 통화하면서 "김대중씨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 '예스'와 '노' 하나로만 대답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고 키신저는 김대중을 살리겠다는 뜻에서 '예스'라고 대답을 했다.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와 국무부 한국과장 레너드가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미국 외교정책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키신저가 이에 동의를 하면서 김대중구명활동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8월 8일 12시 30분(일본 시간 9일 오전 1시 30분)에 '미국은 김대중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그가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
이 순간 김대중의 상태는 어땠을까? 9일 새벽 1시 경에 큰 배로 옮겨진 김대중의 몸에는 50kg 이상의 큰 돌이 매달렸고 물에 떠오르지 않도록 솜을 붙여야 한다는 등의 말을 듣는 등 수장(水葬)의 공포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4~5시간 정도 시간이 지난 새벽 5~6시 정도에 갑자기 비행기 소리와 함께 소란이 발생했고 그 이후 김대중에 대한 수장위협이 사라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것이다.
김대중의 국제적인 영향력과 위상을 보여주는 키신저와의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