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입수한 '의용단 취지서'
국사편찬위원회
의용단원 유성삼은 곧바로 중요한 작전에 투입됩니다. 그해 8월 미 의원단의 방한에 맞춰 광복군총영의 특공대(폭탄대)원들이 평양에 잠입하여 평남도청·평양경찰서 등에 대한 폭탄 투척을 시도할 때, 이를 보조하는 일을 맡게 된 겁니다.
거사 당일인 8월 3일. 유성삼은 평양 시내 곳곳에 동포들의 호응과 친일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살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또 문일민 등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을 때, 평양부청에도 폭탄을 던지려 했으나 이미 평남도청에 터진 폭발로 이목이 번다한 관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복군총영 대원들이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성공시키고 탈출한 뒤에도, 유성삼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평양에 남아 '제2의 거사'를 준비합니다. 평남도청 제3부(경찰부) 소속 경찰관이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때, 차량을 습격해 그를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성삼은 동지 표영준과 함께 곧바로 계획을 실천에 옮깁니다. 8월 9일 오후 9시경 잠복하고 있다가 목표물이 지나갈 때 각각 4발, 3발의 총탄을 발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당 차량은 경찰부 차량이 아닌 평안자동차상회 차량이었습니다. 운전자는 다행히 찰과상에 그쳤고, 거사에 실패한 유성삼은 현장에서 도주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주일 뒤 유성삼이 맞이한 허망한 최후입니다. 그는 16일 동지의 오인 사격에 의해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어떤 사유로 그가 오발탄을 맞게 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결국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사흘 만인 19일 숨을 거두고 맙니다. 향년 23세. 결사보국을 맹세하며 의용단에 입단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참으로 어이 없는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