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표지
한겨레출판
저자가 진단하는 국제 정세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미국 단일 패권의 시대는 끝이 났고 다원패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찾아온 미국 단일 패권의 시대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실패,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미 제국의 약화로 주변 강대국들이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역의 맹주들이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패권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중요한 하위 파트너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러시아와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고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과거라면 미국의 적대국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다만 미국의 패권이 끝났다고 해서 미국이 몰락한 것이라고 진단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여전히 금융, 문화, 학술영역 같은 연성권력을 막강하게 보유하고 있으며, 제조업 생산력에서 조만간 중국이 미국을 앞지르더라도 앞으로 다가올 세계는 중국이 미국의 단일 패권을 대체하는 세계가 아닌, 다극화된 세계라고 전망한다.
단일 패권 국가, 다시 말해 독불장군 깡패국가의 힘이 약해진 것이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박노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런 다극화된 세력 균형에서 균형이 조금이라도 깨질 거 같으면 각국은 바로 군사적 대응에 나서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의 위기가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러시아는 전쟁을 왜 멈추지 못하나
박노자는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면서도, 러시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일부 좌파 논객들과는 다르게 이 전쟁의 원인을 나토의 동진에서 찾지 않는다. 나토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의 내부의 정치와 경제, 시민사회를 분석한다.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인 면에 대해서 박노자는 푸틴의 러시아는 비밀경찰 관료집단이 장악했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적 정치적 의사표현이나 집단행동의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년 병역거부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러시아 평화활동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체 사진을 찍을 때 피켓으로 얼굴을 가렸고, 동영상 자료에서는 음성을 변조하고 얼굴을 가린 채 인터넷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부인 데다, 그 정부가 추진하는 개발 모델이 굳이 비교하자면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 1970년대 한국에서 추진된 병영국가화 및 방위산업 발전에의 중점과 닮은 "국가 주도 개발 전략"이라고 평가한다(139쪽). 그렇기 때문에 박노자는 이 전쟁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의 종전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처럼 푸틴도 협상을 질질 끌면서 그에게 득이 되는 전쟁 행위를 계속할 가능성이 있다(140쪽)고 전망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군사케인스주의적" 경제 부양책으로 러시아는 2023년에 나름의 경제성장(약 3.5% 예상)을 이루려 하는데, 이는 예컨대 독일 등 침체에 빠진 유럽의 주요 경제들과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호전성은 네오나치 섬멸 따위가 이유가 아니라 "자본"이 "연성권력"의 측면이 약한 러시아 지배자들이 가장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치 수단이며, 그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러시아 국가와 자본은 "이윤"도 챙길 수 있(144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 내부에서 푸틴에 반대하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움직임이나 시민 저항이 크지 않은 이유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 정부라는 정치적인 면도 크게 작용하겠지만 박노자가 주목하는 것은 러시아 경제와 산업의 구조적인 측면이 시민들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러시아 국내 제조업의 대부분은 군수공업이거나 군수업체의 유관 기업이기 때문에 전쟁 없이는 전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국 또한 군수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은 무역에 의존하는 수출 주도형 국가라서 전쟁이라는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이 국가 경제에 마냥 좋은 일이 아닌 반면, 무역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국내 산업에서 군수산업의 비중이 한국보다 막대하게 큰 러시아는 전쟁이 없으면 국가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푸틴 정권에 의해 여섯 배나 증가한 군부 예산의 증액을 쌍수 들어 환영(45쪽)했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국가의 무기 구입 예산을 늘리고 있는 현 정권이나, 그것보다 더 강하게 서방과 대립해 보다 많은 무기를 사들일 것으로 보이는 연방 공산당에 투표하는 추세(25쪽)라는 것이다.
2022년 9월 푸틴이 동원령을 발표한 뒤 러시아를 탈출한 사람들 중에 제조업 노동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생계가 저당 잡혀 국가에 포섭된 러시아 노동계급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러시아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전시 동원 면제를 누린다고 하니 이런 정치성 성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일면 이해가 간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방위산업이 경상남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조선업과 같은 전통적인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그 자리를 군수산업이 꿰차고 있는 형국이다. 경상남도 교육청이 무기박람회 아덱스에 자릿값이 수백만 원 하는 부스를 운영하는 것은, 이 지역들에서 군수산업이 생계를 책임져주는 일자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한국은 러시아보다는 군수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낮고, 수출주도형 국가라서 전쟁 산업에 휘둘리는 경향도 덜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이나 시민들이 전쟁에 저항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측면만 보자면 평화활동가로서 이는 굉장히 큰 문제다. 군수산업의 비중이 커질수록 해당 지역은 전쟁에 찬성하는 여론이 힘을 가질 가능성이 높고, 그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은 이 여론을 대변할 것이다.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큰 힘이 시민들의 저항에서 나온다면, 전쟁을 원하는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군수산업의 성장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저항을 무마하는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 한국 평화운동이 이미 마주하고 있고, 앞으로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중단을 국가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